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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DJ, The Black Madonna
2016년 최고의 셀렉터와 함께 한 주말
글: Louise Brailey 사진: Uli Weber 라이브 포토: Aldo Paredes 스타일리스트: Deborah Latouche 헤어&메이크업: Jane Jakobi | 2016-12-28
Mixmag이 선정한 올해의 DJ는 댄스플로어를 도취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는 환상적이고 다각적인 셀렉터일뿐 아니라 이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하는 확신과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생일선물에 관한 한 The Black Madonna의 수확물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이제 막 리버풀(Liverpool)의 Invisible Wind Factory에서 공연을 시작한 참이다. 이 날은 그녀의 39번째 생일이기도 하다. 그녀가 딴 것은 누군가 알랑거리며 DJ 부스로 가져다 준 재킷 한 벌, 무대난입자 한 명, 앞줄에 있던 두 명이 준 카드 한 장(카드에 적힌 글귀는 아니나다를까, ‘All You Need Is Love’다)이다. The Black Madonna의 팬들을 보고 애정을 숨김없이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배스하우스 디스코에 부스에서 피루엣 턴을 하든, 새벽 5시에 관중에게 ‘Pump Up The Jam’ 떼창을 유도하든, Marea Stamper는 아무리 체념한 새벽 1시의 불가지론자라도 클로징 즈음까지는 충성스러운 신도로 개종시킬 수 있다. 하지만 Mixmag이 케이크 한 조각 얻어먹을까 싶어 백스테이지에 갔다가 만난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다. “내 방탕한 30대도 이제 끝물이네.” 그녀가 생일주로 딴 버본 병을 기울이며 짐짓 현자 같은 태도로 말한다. “매 생일마다 자기 신발에 토하는 걸로 마무리를 할 필요는 없지.”

The Black Madonna, 댄스문화가 자기 신발에 토하는 걸 멈춘 사람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녀다. 선동가이자 대사, 아웃사이더 군주인 그녀는 무명의 설움을 딛고 2016년 일렉트로닉뮤직을 주도하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발돋움했다. 테크노와 디스코, 하우스의 스윗스팟을 잇는 Marea는 댄스뮤직의 50년 역사의 서체와 그 통일성과 급진주의의 원래 메시지로부터 현대를 위한 성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리 들어도 부족하다. 올 여름, 그녀가 Dekmantel부터 DC10까지 구석구석 누비며 만난 관중은 Panorama Bar 마라톤 DJ 셋, 강력한 Boiler Room 원정, Home Taping Is Killing Music, Stripped & Chewed, Argot 릴리스를 통해 확보한 관중보다도 그 수가 훨씬 엄청나다. 성공적인 2016년이 저물어가는 이때, 한 가지 불변의 진리가 떠오른다. The Black Madonna가 함께 하는 댄스뮤직이 훨씬 낫다는 것.




The Black Madonna의 고단한 유럽투어의 마지막 주말에 편승한 Mixmag은 그녀의 온정과 유머감각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녀에 의하면 그녀의 성공을 있게 한 것도 바로 그 성품이다. 생일축하를 마친 다음 날, 그녀가 미소띤 얼굴로 말한다. “우린 강철로봇 같은 테크노가이들의 시대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거든. 그러면서 나는 막 이랬고. ‘야, 뭐하냐~ 사랑해애애애애~~!’” 말보다는 마음과 행동이 앞서는 Marea는 무표정한 테크노가이의 정반대였다. 흥분을 잘 하고, 생각과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좀… 엄마 같은 느낌? “있지, 나는 약간 엄마 같은 타입이기도 해. 진짜 완전. 완전!” 하지만 그녀가 댄스뮤직의 어머니라면 분명 흥 넘치고 이상한, 결정적으로 쿨한 엄마다. 검은 베스트, 두드러지는 타투, 탈색한 언더컷 스타일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그녀는 또한 독서광인데다가 실천적인 천주교도다. 블랙마돈나라는 예명은 어두운 색의 나무나 돌로 만들거나 색이 어둡거나 초 연기 때문에 색깔이 어두워진 유럽의 오래된 마리아 성상들을 의미한다. 영성과 여성성의 강렬한 상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이 블랙마돈나는 그것과는 좀 느낌이 다른 상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점점 두터워져 가는 자신의 팬층을 두고 그녀가 말한다. “임계점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주변이 온통 나를 찍어대는 스마트폰 천지더라고. 그게 되게 초현실적이었고 적응하기도 어려웠어. 그런 건 Marcel Dettmann처럼 생긴 사람들한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묻자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말한다. “난 40대 여자처럼 생긴 40대 여자잖아!”

그렇다 하더라도 어쩐지 비관습적인 언더그라운드스타인 그녀는 튀는 것에 익숙하다. 켄터키(Kentucky)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머니는 사서, 아버지는 블루스 뮤지션이었다. 다만 Marea의 억양은 너무 희미해서 나 같은 영국인이 듣기에 그녀가 가끔 ‘girls’를 ‘gals’로 발음하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지만. 그녀의 가족은 가난하지만 지적이었고, 특히 그녀의 할아버지는 CS Lewis와 동시대를 산 철학교수이자 성직자였다. Marea는 할아버지를 존경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역대 최고의 독서가셨어. 나도 할아버지가 읽은 책들을 많이 읽었어. Thomas Merton의 작품이면 모조리 읽었고, 종교나 미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봤지.” 자연히 어린 시절의 그녀는 또래보다 성숙했고, 또한 자연히 괴롭힘을 당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녀의 표정이 씁쓸해진다. “중학교에 갈 때 통학버스를 타고 다녔어. 애들이 다 앉기엔 의자가 부족했지. 다른 애들은 나를 같이 못 앉게 해서 나는 그냥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서서 가야 했어. 버스가 올 때마다 나는 제발 누군가 아파서 빈 의자가 있기를 기도했어.”




Marea에게 있어 음악은 자기보호수단이었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 덕분에 음악에 철저하게 몰입할 수 있었어.” 그녀는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기 위해 화장실에 몰래 숨어 들어가곤 했고, 그곳에서 Madonna와 Deee-Lite의 Lady Miss Kier가 사는 생생한 판타지를 꿈꿨다. 이 두 초기의 음악적 망상은 그녀에겐 곧 자유와도 같았다. 한 상급생 친구의 손에 이끌려 불법 레이브에 몰래 들어간 14살의 Marea는 그곳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았다.

“너무 근사했어. 고등학교와는 완전히 달랐지. 그냥 내가 나일 수 있는 완벽한 자유였어.” 벨기에하드코어, Pucci 레깅스, 자신과 비슷하게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찾았고, 더 이상 뒤돌아볼 것도 없었다. 2년 후, 그녀는 자퇴를 하고 불법 파티에 쓸 믹스테이프를 파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함께 레이브를 전전하며 상품을 팔면서 그녀는 미국 중서부 레이브 씬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디제잉 스타일 역시 그로부터 영구적인 영향을 받았다. “내 안에는 늘 하우스의 이성을 가진 19살 정글리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그녀가 시인하더니, 전형적인 90년대 이벤트를 묘사한다. “파티에 Jeff Mills, 그 바로 앞에는 Paul Johnson이 있고 그 다음에는 Aphex Twin이 있는 식이었지.” 그녀가 배운 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그녀의 몸에 단단히 박혔다. Michael Zager Band의 ‘Let’s All Chant’, Green Velvet의 ‘Flash’, Goody Goody의 ‘It Looks Like Love’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DJ는 많이 없다.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Relax’를 토요일 밤 The Warehouse Project 무대에 선 그녀처럼 정신적인 체험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DJ는 더 더욱 적다.

그녀는 1997년에 디제잉을 독학했다. 몇 년 후, 루이빌 대학교(Louisville University)에 영어전공으로 입학한 그녀는 자신의 광대역 음악취향을 학교 방송국에 집중시켰다. 비록 로스쿨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확고했지만(“라틴어까지 다 배웠다니까.”). 그러다가 믹스테이프세계에서 알게 된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Radoslaw ‘Radek’ Hawryszczuk는 이제 어엿한 레이블 오너 겸 프로듀서였다. 시카고 밖에서 Dust Traxx 레이블을 운영하던 그가 Marea에게 카탈로그를 디지털화하는 일을 제안했다. 중서부 씬에 너무나도 깊은 영향을 준 도시의 부름에 거절할 수 없었던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거처를 옮겼다. “당연히 내 영웅들 발자취를 따라가야지. 내가 시카고에 도착했을 즈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DJ는 Paul Johnson이었어. 나는 시카고의 쟁쟁한 인물들을 꿰고 있었어. Derrick Carter도 좋아했고, DJ Heather도 좋아했고, Boo Williams, Terry Mullan도 좋아했고… 내가 켄터키에서 자라는 동안 그들처럼 되려고 열심히 흉내를 냈었지.” 그녀는 Dust Traxx에서 일하고 Radek의 가족이 운영하는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영웅들의 뒤를 좇고 또 좇았다.

“초연이라고 하기도 좀 뭐해. 그 과정 자체가 굉장히 길었거든. 파티에서 50달러에 디제잉을 하는 일을 수년 간 계속했어. 돈을 안 받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Marea는 Lady Foursquare 등 다양한 예명으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이름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뱅어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그런 행사에서 플레이를 하면서 그때까지는 콜라보 작업이 주였던 그녀의 프로덕션은 그녀만의 사운드를 콕 집어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가 레이브 세계와 확실하게 결별할 때까지 계속 그런 식이었고, 그 후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며 패배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빤한 소리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기대치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작품에 녹여내기 시작하니까 그제서야 사람들이 반응하더라고.” 하지만 그 과정엔 단점도 있었다. “상당한 아픔이 있었지. 내 룸메이트들은 방에 들어왔다가 바로 돌아서서 나가면서 사람들에게 ‘저기 지금 영 어두워’라고 말해주던 게 생각나네.” 바로 거기서 The Black Madonna가 탄생했다.




그렇게 어둠에서 빛이 탄생했다. 2012년의 ‘Exodus’는 시카고 하우스 DJ들 사이에서 빅이슈가 되었고, Derrick Carter가 첫 선을 보였다. 비록 ‘Lady Of Sorrows’의 B 사이드였지만 Marea에게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곡이었다. ’A Jealous Heart Never Rests’는 그녀의 고독감을 가져다 태연하게 디스코의 지주로 삼았다. 그 트랙이 일종의 슬픔에 탐닉하는 동안 레이블은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잡고 기다렸다. 물론 그게 통했다. 부킹 요청이 쇄도했고, 그러다 처음으로 유럽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왔다. Panoramabar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그토록 고군분투했던 Marea가 자신의 연단을 여성과 유색인종, LGBTQ 커뮤니티의 발언대로 삼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클럽역사의 중심에 있었지만 툭하면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상업주의의 둔감하고 어리석은 힘에 의해 억눌려있었다.

시카고의 전설적인 클럽 Smartbar에서 맡은 역할이 한몫 했다. 그녀는 2012년, The Black Madonna 프로젝트가 막 시작했을 즈음 그곳에 레지던트로 갔고, 그 클럽의 34년 역사상 최초의 재능 발굴인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며, 그곳에서 일하는 내내 Honey Soundsystem, Derrick Carter, DVS1 등 다양한 레지던트 라인업을 꾸려 북미 하우스뮤직의 유산을 모든 관점에서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Marea는 시카고를 넘어서는 변화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댄스뮤직이 여성을 대하는 분위기를 자주 비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응원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녀가 덤덤하게 말한다. “누가 놀란다는 것 자체가 놀라워. 이 세상이 진정 여성들의 침묵에 의해 단결되어 있다는 증거야. 침묵을 함으로써 관계며, 일자리며, 공동체, 가족을 단결하지 않는 여성이 없어. 우리의 모든 인생, 모든 권력구조, 모든 씬, 모든 댄스클럽, 모든 게 여성은 자신에게 일어난 특정한 일들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관념에 의해 단결되어 있어. 목소리를 냈다간 거지 같은 일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한다. 그것도 큰 목소리로, 자주. 그녀가 디제잉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더라도 일렉트로닉뮤직 트위터에서 그녀의 이름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녀의 꾸밈 없는 의견과 개선책은 푹 끓여진 콘텐츠의 죽 속에서 입에 걸리는 연골조각 같다. “내가 딱히 특별한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 안 해.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내가 문제보다는 해결책에 관심이 훨씬 많으니까 사람들이 기꺼이 듣는 거지. 공공연하게 목소리를 내고 떳떳하게 페미니즘 활동을 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겪지는 않느냐고? 물론, 가끔은 그래. 하지만 어떻게 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잘 모른다 하더라도 그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기운이 나.”

물론 뿌리깊은 권력구조를 공격함으로써 받는 부정적인 반응도 상당하다(그녀는 트위터의 차단버튼을 자주 애용한다고 한다.). 대화에서 물러나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었냐고, 이런 중요한 이슈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것이 지치지는 않는지 묻자 그녀가 대답한다. “대화에서 물러난다는 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룻밤 자고 일어나도 나는 여전히 남성지배적인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일 테니까. 하지만 내게 마이크가 주어지는 한, 억눌려 있는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싶어. 사람들은 Honey Dijon의 목소리도, Discwoman의 목소리도 들어야 해. Peggy Gou의 목소리도, Wendy Carlos의 목소리도 들어봐야 해.”




그녀가 시카고에 와서 일하라는 운명적인 요청을 받지 않았더라면 정치판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의 트위터 피드는 정치색이 짙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민주당에 가입하는 거였어. 내가 정말 아끼는 후보를 위해 연설문을 썼으면 했지.” 이후에 그녀는 자신의 미친 듯한 투어일정을 미국 선거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거에서 이기고 싶을 뿐만 아니라 권한 위임을 원해!” 그녀가 특유의 기운찬 웃음소리를 내며 웃는다. 가끔 보면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포기했다기보다는 방향을 재설정했을 뿐인 것 같다.

댄스뮤직과 사회 전반이 유토피아와 거리가 멀다면 Black Madonna 공연의 앞줄에 선다는 것은 그보다 더 나은 어딘가로 옮겨지는 것과 같다. 땀 범벅이 되어 환호하는 무리들 속에(그녀의 공연에는 여자들도 많지만 남자들도 많다) 있어보면 The Black Madonna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못 느낄 수가 없다. 스스로의 짐을 덜고 싶어 그녀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사랑에 그녀의 고독감이 섞여있다고 생각하면 비약이 너무 심한 걸까? 그녀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지금껏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어딘가에 있으면 안 될 존재처럼 느끼면서 살아왔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그 느낌을 사람들에게서 덜어줄 수 있다면, 내가 차라리 그 느낌을 그들로부터 가져올 수 있다면…”

감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분열정치와 신 보수주의, 끈질긴 어둠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The Black Madonna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댄스플로어 위에서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줄 것이고, 아픔을 덜어줄 것이고, 눈물을 땀으로 바꿔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이 현실이 훨씬 더 나은 곳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녀가 감정에 북받치는지 목이 멘 소리로 말한다. “댄스뮤직에 빠지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거야. 하우스뮤직의 세계에 들어간다면 거기서 위안을 얻을 거야. 난 각 사람의 이야기는 모르지만 하우스의 능력은 알고 있어. 사람들이 댄스뮤직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변혁의 순간, 그 순간들은 실제야.” 아멘이다.


The Black Madonna의 ‘We Still Believe’ 음반사의 새 싱글 ‘He Is The Voice I Hear’가 2017년 1월 초에 발매될 예정이다. 12인치 리미티드 에디션은 지금 바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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