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씬을 키워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은 페스티벌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꽤 오랜 시간 한국의 여름을 담당하는 페스티벌의 장르는 록 혹은 재즈였는데, 울트라 뮤직페스티벌의 상륙 이후 비슷한 류의 EDM페스티벌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모든 페스티벌들이 상업적인 성공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각자의 색깔과 변별력을 사람들에게 어필하며 한국을 아시아 댄스 뮤직의 성지로 발돋움시켰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공 속에서 무언가 빈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대규모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페스티벌들이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양적 확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댄스 뮤직씬은 항상 무언가가 부재해있었다.
각 댄스 뮤직 페스티벌들은 그 컨텐츠와 지향점 그리고 무대 디자인, 전체적인 브랜딩 등에서 각양각색이지만, 근본적으로 한 가지 같은 구조 혹은 부재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이 모든 댄스뮤직 페스티벌이 95% 이상의 해외 컨텐츠, 즉 해외 댄스뮤직 프로듀서들의 디제잉 / 라이브 셋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물론 페스티벌에서 국내 프로듀서들의 디제잉 혹은 공연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내 댄스 뮤직 페스티벌에서 로컬 뮤지션과 로컬뮤지션의 음악은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의 존재감만을 부여 받았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주최 측의 잘못은 아니다. 만약 우리 댄스 뮤직 씬에 힙합씬의 박재범이나 락씬의 자우림 같이 흥행 보증 뮤지션이 있다면, 댄스뮤직 페스티벌의 라인업 또한 로컬 뮤지션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에겐 그런 뮤지션 혹은 프로듀서가 거의 없으며, 또 있다 하더라도 댄스뮤직 페스티벌들이 핵심적인 컨텐츠로 삼는 해외 프로듀서들의 파급력에 비해 파급력이 미약하다.
어쩌면 해외 프로듀서 위주의 시장은 우리 댄스 뮤직 씬이 처한 냉혹한 현실일 수도 있다. 한국의 음악시장은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해외 프로듀서에 대한 수요만 있는 시장으로 발전된 것 일 수도 있다. 음악과 페스티벌이란 것이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 할 문제는 아닐테지만, 많은 공연 기획자들의 소명이 그저 이 현실에 순응해 끊임없이 해외의 음악을 소개해 국내의 레이버들과 즐기는 문화적 상인의 역할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해외 프로듀서들이 쏟아내는 댄스뮤직의 참신함과 혁신성, 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가장 건강한 씬은 로컬의 뮤지션들과 해외의 뮤지션들의 음악이 상호 작용하면서 생명력을 계속 키워나가는 씬이라는 전제 아래 광야에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로컬씬의 재창출이라는 고된 일을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고된 씨앗을 뿌리는 행동은 이미 다 자란 나무들을 위해서 과실을 따먹는 행위만큼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문화계라는 생태계를 만들어가기에는 더없이 소중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 덜 화려하지만, 좀 더 소중한 행동을 하려는 것이 2017년 가을의 천안에서 열리는 OWL 페스티벌의 지향점이다.
프랑스 파리의 일렉트로니카 씬은 한때 Daft Punk를 중심으로 문화적 부흥의 정점을 이뤄냈고, 그 이후 많은 서구의 뮤지션들이 추종하는 일렉트로니카 뮤직의 전형을 만들어냈지만, 여러 사정과 스캔들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생기를 잃기 시작했다. 호사가들과 언론은 그런 파리의 일렉트로니카 씬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듯이 모든 것이 끝난 씬이라고 선언했으며 실제로도 파리의 일렉트로니카는 주변국들의 음악을 수용만 할 뿐 창조적인 무언가를 뱉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콘크리트등 몇몇 언더그라운드 파티에서부터 다시 불기 시작한 재생의 바람은 파리의 음악을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주목해야 할만한 무언가로 바꿔놓았고 그때부터 파리는 조금씩 자기만의 박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파리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 외치기 시작한 구호는 ‘씬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모여, 무언가 계속 일을 만들고 파티를 기획하는 행위를 멈추지 말 것`이었다.
우리도 일단 모여야 한다. 장르와 이념에 상관없이, 이태원 홍대 혹은 강남의 유치한 알력관계 상관없이, 서열 연차, 프로듀서, 디제이, 클러버, 레이버, 관계자, 언론인등의 구분에 상관없이, 이 장르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일단 모여서 무언가를 굉장히 북적거리게 해야 한다. 지향의 촌스러움과 경험부족에서 오는 어설픔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록 그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갖추게 된다. UMF는 처음부터 Ultra 하지 않았을 것이다. Sonar는 동네 친구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만들어졌다. Laneway는 동네 지역의 페스티벌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이름에 지역명이 들어간다) 그들이 가능했다면 왜 OWL 페스티벌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지역페스티벌이고 로컬 위주의 페스티벌이지만 모이고 모여서 다수의 군중이 음악을 즐기기 시작하면 맥락은 거기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멋적음을 거둬들이고 일단 모여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OWL의 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모든 페스티벌들이 이미 만들어진 브랜드에 편승하려 할 때, OWL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고 로컬을 개척하며 무료로 페스티벌을 개방해 모든 이와 페스티벌을 공유하려 한다.
결국 생태계의 생명력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이란 깊은 뿌리와 같아서 다양성이 한 생태계에 그득하다면 그 생태계는 외부의 공격과 풍화에 쉽사리 피해를 받지 않는다. 화려한 것은 언제나 줄기와 잎의 몫이지만 장기지속성은 뿌리의 다양성에서 형성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씬의 생명력을 늘리기 위해 다양성을 반드시 키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페스티벌에서 회자되고 있는 다양성은 오로지 장르에 대한 다양성 일뿐이다. EDM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을 통해서 EDM 말고 다른 장르의 음악도 사랑 받아야 한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Techno, Hard Style, Disco팬들은 목놓아 외치고 있다. 맞는 이야기다. 장르적 다양성 또한 다양성의 아주 중요한 항목이다. 하지만 그 어떤 음악의 ‘수입`도 우리 스스로의 음악을 만드는 것만큼 우리를 다양하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씬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일이 아니다. 일단 OWL에 와서 우리의 프로듀서들과 한바탕 춤사위를 추는 것은 미약한 한걸음이지만, 충분히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당신이 누구건 OWL에 오라.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일 것이다.
Written by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