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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Summer Of Love
댄스뮤직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시대를 기념하며
글: Bill Brewster 사진: Dave Swindells & Gavin Watson | 2018-05-25
1988부터 1989년, 소수의 사람들이 이비사의 댄스플로어에서 들여온 클럽컬처는 영국 전체의 클럽과 창고, 들판에 불꽃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패션과 디자인, 클러빙, 음악뿐 아니라 실로 전 세계를 영원히 바꿔버린 사랑과 창조의 멈출 수 없는 초신성을 이뤘다. 이번 호 Mixmag은 두 번째 ‘Summer of Love’의 아주 특별한 30주년을 기념한다. 당시의 불꽃을 오늘날까지도 이어온 클럽들, 페스티벌들, 아티스트들과 파티들의 자료사진들과 기사들을 공개하고, 스페셜 패션화보로 그 시절이 불을 지핀 자유의 광채의 영향을 가장 직접 받은 브랜드들과 신진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며, 그리고 Bill Brewster의 특집기사를 통해 댄스뮤직의 Summer of Love가 남긴 유산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영감을 주고 있는지 탐구한다.

1988년, 영국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맞이했다. 그것은 폭력적인 폭동이나 트라팔가 광장에서의 데모, 소셜미디어를 조작하는 어둠의 세력들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 무혈의 혁명을 일으킨 주체는 시카고와 디트로이트, 뉴욕에서부터 전해진 수많은 음반들과 엑스터시라고 불리는 사랑의 약물, St Vitus 댄스를 추는 정신 놓은 젊은이들이었다.





히피적 기원을 따져보자면 1967년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지만 댄스뮤직의 Summer of Love는 30년 전,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있는 폭발적인 사건이었다. Summer of Love는 패션과 마약, 클럽, 정치, 그리고 전성기마저 바꿔버렸다. 그 시기의 음악은 애시드하우스라고 알려졌지만 그것은 Alfredo가 Amnesia에서 선보인 펑키 팝 음반부터 디트로이트 테크노, 시카고 하우스, 뉴욕 개러지와 심지어 힙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사운드를 압축한 것이었다. 이 음악은 1988년에 강력하고 새로운 약물과 함께 우리가 지금까지 본 가장 광범위하고 지속성이 강한 유스컬트(youth cult)를 탄생시켰다. 영국의 젊은이들이 해방하고(turn on), 화합하고(tune in), 벗어나는 것(drop out)을 발견하게 된 해였다.

순간, 이전에 확실했던 모든 것들이 혀에 닿은 알약처럼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한 번 시도해보는 것, 그리고 신경 끄는 것만이 전부가 되었다. 배관공들은 DJ가 되었고, 항공기 직원들은 레이블을 차렸고, 은행관리자들은 직장을 때려 치고 클럽을 열었다. 모두가 인상주의자였고, 튠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격은 개뼉다귀 취급을 받았다. 말발과 덱 세트만 있으면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었다.

Summer of Love는 우리가 춤을 추는 방식과 장소 뿐 아니라 우리의 관계와 상호작용,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까지도 바꿔놓았다. 안개 낀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는 어느 순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미소를 짓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집단이었다. 잠시 동안은 마치 십대들만 알고 있는 국가기밀 같았다. 경찰들은 어쩔 줄 모르고, 정치인들은 겁먹은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양조장들마저 허둥지둥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법을 끌어 와 그것을 억제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혁명을 억제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 전에는 나가 노는 게 다소 흑백판이었다면 이제는 테크니컬러판이 된 거야"


변화
Nancy Turner (이후에 DJ Nancy Noise가 됨)는 1986년 여름 내내 이비사에 있었다. 그녀는 6월 어느 날 Amnesia를 알게 되었고 Amnesia의 음악과 레지던트 DJ들인 Alfredo와 Leo Mas에 푹 빠졌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여름 내내 똑 같은 음악을 틀더라고. 발레아리스판 세뇌 같았어! 우리 일행은 여름이 지나고 섬을 떠났는데 입만 열면 말 그대로 Amnesia 얘기밖에 안 했어. 미친 놈들 같았지.” 이듬해, Turner는 다시 한 번 시즌 전체를 이비사에서 보낼 돈을 모았고 밤마다 Amnesia에 갔다. 그녀는 나른한 여름날을 보내며 Paul Oakenfold와 그의 친구들인 Nicky Holloway, Johnny Walker, Danny Rampling을 만났다. 하나 같이 Amnesia와 새로운 마약 엑스터시에 사로잡힌 상태들이었다. 어느 날 Oakenfold가 Nancy의 아파트에서 Alfredo의 고전 컬렉션을 발견하고 돌아와선 자신의 새로운 나잇파티 Future에 그녀를 초대해서 음악을 틀 수 있는 기회를 줬다. 1988년 1월의 오프닝이 Turner의 최초의 디제잉이었다.

새로운 개방의 시대에 A학점이나 학위는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열정과 약간의 대담함, 음반가방이었다. 당시 글래스고에서 살고 있었던 Optimo의 JD Twirch는 말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하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내가 해야 하는 게 바로 이거야.’ 갑자기 누가 내 인생이 총천연색이 된 것 같았어. 그 전에는 나가 노는 게 약간 흑백판이었다면 이제는 생생한 테크니컬러판이 된 거야. 그게 얼마나 짜릿했는지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네.”

도시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소수의 DJ들이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걸면 하우스를 발견하는 클러버들의 수는 늘어갔다. 리버풀은 Andy Carroll과 Mike Knowler, 노팅엄은 Graeme Park와 DJ Jonathan, 리즈(Leeds)는 Nightmares On Wax, 셔필드(Sheffield)는 Parrot과 Winston, 스코틀랜드는 Slam과 Harri가 책임졌다. 런던에는 Colin Faver, Kid Batchelor, Jazzy M, Eddie Richards, the Watson brothers, Mark Moore가 있었고 Asylum, Shoom, Spectrum, Clink Street, The Dungeons 같은 클럽들이 있었다.




"세상에.. 다들 함께 빠져들었어. 온 나라가 한 그루브 안에 하나가 되었지."


영국의 작가 Jane Bussmann은 1988년 초에 LA에서 일하던 중 남자친구로부터 소포를 받았다. “‘The London Acid Scene’이라고 적힌 카세트를 받았어. 굉장히 삑삑거리는 사운드에, 환상적인 애시드하우스뮤직이었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너 진심 런던에 빨리 돌아와. 나는 무슨 나무처럼 춤추는 중이야.’”

1988년 2월에 시작된 Hedonism은 단지 네 번의 파티밖에 열지 못했지만 런던의 여러 족속들을 한데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Nicky Harwood aka Nicky Trax는 말한다. "나는 하우스뮤직 전도사였어. Hedonism은 창고에서 열린 무료파티였는데 정말 대단했지." 당시에는 어느 클럽이든 사운드시스템이 별로였는데, 하우스는 이렇게 들어야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창소에 배너들을 걸어놓고, 빵빵하게 울리는 스피커와 레이저, 스모크머신을 갖다 놓고 들어야 하는 거란 말이지. 그렇게 밤새도록 하우스뮤직만 듣는 거야." 본래 Hedonism에게 영감을 준 Shoom 파티의 주인공 Danny와 Jenni Rampling은 첫 번째 파티가 열린 그 날에 결혼을 했고 그날 밤 알페르튼(Alperton)의 한 창고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하우스뮤직을 유행에서 현상으로 바꿔버린 또 하나의 마법 같은 요인은 엑스터시였다. 작가 Matthew Collin은 말한다. "엑스터시는 가속기였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약이었지. 하우스뮤직을 만든 게 엑스터시는 아니지만 엑스터시는 하우스뮤직의 커뮤니티를 탄생시키는데 한몫을 했어. 그리고 그 약으로부터 얻는 집중도는 정말 강렬했어. 물론 엑스터시가 없었어도 일렉트로닉 댄스뮤직 컬처는 생겨났겠지만 그 방식과 과정은 철저하게 달랐을 거야."

변화는 극적이었다. Noel Watson은 하우스가 처음으로 수입품점에 들어온 80년대 중반부터 동생 Maurice와 함께 하우스를 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런던에서 선보였던 나잇파티 Delirium의 첫 반응은 어찌나 나빴던지 그들은 날아오는 병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DJ 부스 둘레에 우리를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엑스터시가 모든 것을 바꿨다. Watson은 회상한다. "안티하우스였던 사람들이 다들 갑자기 하우스를 좋아하는 거야. 서로 껴안고 말이야. 정말 놀라웠어. 내가 `Strings Of Life`를 틀면 사람들은 완전 미쳐버렸지."




"우린 대처의 영국과 관련 없어. 우린 무법자들이야. 길거리에서 춤을 춘다고."


맨체스터의 The Haçienda의 금요일밤 레지던트였던 Mike Pickering은 1985년에 Trax에서 하우스가 처음으로 발매됐을 때부터 하우스를 틀었다. 그는 1988년까지 자신의 나잇파티를 런던 탑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던 중 엑스터시가 등장했다. 클러버 Catherine Obi는 말한다. "우린 그 모든 게 시작되기 전부터 Haçienda의 단골이었어. 그러다 어느 주말에 평소대로 블랙 스키니랑 DM, MA1 보머재킷을 입고 Haçienda에 갔는데 사람들이 온통 티셔츠차림에 땀 범벅인 거야. 대체 뭔 상황인가 싶었지 한 달 만에 우리도 처음으로 알약을 삼켰는데 정말 마음에 쏙 들었어. 분위기가 얼마나 빨리 바뀌어서 진짜 너무 이상할 정도였어. 무슨 집단 히스테리처럼. 그런데 바로 그게 너무 좋았던 거야. 세상에.. 다들 함께 빠져들었어. 온 나라가 한 그루브 안에 하나가 되었지.”

D`n`B의 대부 Fabio는 친구의 추천을 받아 Paul Oakenfold와 Ian StJohn의 런던 클럽 Spectrum을 찾아왔다. "브릭스턴(Brixton)에서 온 친구들 몇 명이랑 같이 거기에 들어갔는데, 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더라. 월요일 밤이었는데 다들 스마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동공은 확장된 채 뭔가를 씹어대면서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돌아다니고 있었어. 친구들은 나한테 `무슨 지옥에 온 것 같네. 우린 브릭스턴으로 돌아간다.` 라고 말하고 나만 남겨놓고 가버렸어. 나는 연기 속에 있는 Paul을 보는데 무슨 신을 보는 줄 알았다니까. 여기 진짜 완벽하게 대박이라는 생각을 했지."

애시드하우스는 모든 가능성의 지표를 열어주었다. 목요일 티타임 즈음부터 주말이 시작되어서 월요일 아침까지도 이어졌다. 패션을 포함해 옛 것들은 모두 버려지고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음악, 새로운 모든 것으로 대체되었다. Haçienda 레지던트 Mike Pickering은 말한다. "1988년과 1989년은 다른 면에서 특별한 시기였어.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 또 직업적으로 바뀌었어. 그 시절에 내가 알던 모든 사람이 애인을 차버리고 대신 진정한 사랑을 만났어."

Jane Bussmann은 말한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Elephant and Castle의 타워 옥상에서 크로아상을 먹고 있었어. 웬 작업복을 입은 텔레비전 수리공 Harvey라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자기랑 똑같이 생긴 인형을 꺼내더니 ‘얘도 Harvey야!’라고 하고 있고. 다 너무 좋았어. 그 다음엔 아래로 내려가서 Fast Eddie를 듣는 거야. 최고지.”





당국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온통 혼란이 가득했다. ‘애시드’라는 단어를 마약 종류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애시드가 E보다 훨씬 쌌기 때문에 애시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긴 했다. 부모들은 엑스터시를 헤로인의 한 단계 밑으로, 자녀들은 맥주의 한 단계 위로 여겼다. 그러더니 언론이 겁을 먹기 시작했다. 1988년 가을, 더썬(The Sun)지는 ‘그루비하고 쿨한’ 애시드하우스 티셔츠를 위한 특별한 제안을 했는데 두 명의 모델이 엄마가 골라준 것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방침이 3주만에 이렇게 바뀌었다. ‘SHOOT THESE EVIL ACID BARONS’. 하지만 영국의 십대들에게 있어 신문의 헤드라인은 하사관 모집광고 이상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Mixmag 에디터 출신인 Dom Phillips가 웃으며 말한다. “더썬이 친절하게도 대대적인 무료광고 캠페인을 벌여준 거지. 일단 5천 명의 아이들이 밤새 춤을 추고 약을 하며 섹스를 한다는 기사가 뜨고 나니 5십만 명의 아이들이 그 파티가 어디냐는 반응을 보였거든.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지.”

거기다 마거릿 대처의 억압적인 정책 덕분에 애시드하우스가 형성되기에 완벽한 조건이 갖춰졌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으로 볼 때 애시드하우스씬에는 기업가들과 반권위주의자들이 모순적으로 혼재되어 있었다. 아웃도어 레이브 프로모터인 Tony Colston-Hayter는 자신의 Sunrise 파티가 가진 영리적인 정신 덕분에 애시드하우스가 도시적 컬트에서 국가적 열풍으로 바뀔 수 있었다고 말했다대규모 사회불안과 노동자파업의 시대였기에 일부 사람들은 자연히 애시드하우스씬을 대처리즘(Thatcherism)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여겼다. 예를 들어 Clink Street 파티는 공식적으로 RIP: Revolution In Progress라고 불렸는데 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이름에서 즉시 인두세와 레이빙 간의 연관성을 떠올렸다. JD Twitch는 설명한다. "대처는 특히 스코틀랜드를 싫어했고 늘 인두세 같은 정책들을 시행했잖아. 만약 보수정권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이게 같은 방식으로 성공했을지 누가 알겠어?"

Fabio는 회상한다. "땀에 흠뻑 젖은 타이다이드 셔츠를 입고 한밤중에 집에 돌아오거나 맨발로 주유소에 걸어들어갈 때면 정말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 우리는 대처의 영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게 정말 기뻤어. ‘우리는 당신과 아무 상관 없어. 9시부터 5시까지 쳇바퀴 돌 듯 일하지도 않는다고. 우린 무법자들이야. 우린 머리에 반다나를 두르고 길거리에서 춤을 춘다고.’ 스마일 배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우리의 동맹이었어. 암호 같은 거였지. 배지를 발견하면 이랬지. ‘그래, 쉿~’ 무슨 은밀한 사회에서 사는 것 같았어. 그때는 대처의 영국이었지만 우리는 이랬지. ‘대처 꺼져라! 토리당 엿먹어!’”





이 청춘의 폭발이 일으킨 잔물결은 북해와 해협,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의 초기 레이브 다수가 영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부터 직접적인 자극을 받았다. 올해 초 Oakenfold와 Mark Moore와 함께 시간을 보낸 DJ Randy Moore는 1988년에 LA에서 동료 프로모터 Mr Kool-Aid (Steve Enis)와 함께 최초의 애시드하우스파티 Sextasy를 열었다. 40명의 사람들이 참석해서 하우스뮤직에 맞춰 춤을 추었다. 최근 맨체스터로 이주한 Michael Cook은 그가 잘못된 시기에 이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두 사람을 만났다. LA의 주도적인 DJ 중 한 사람이 된 Cook이 말한다. "나는 고향에서 들은 적이 있었던 그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 여기서 비슷한 일을 일으킬 수 있는지 보려고 말이야." 뉴욕에서는 런던 국외거주자인 DJ dB가 레이브를 열기 시작했다. 그 레이브는 결국 매우 영향력 있는 NASA가 되었다.

그것을 만지는 모든 사람을 감염시켰다. 프랑스인 Laurent Garnier는 누이의 식당에서 일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이사했다가 결국 The Haçienda의 DJ가 되었다. Garnier는 자서전 Electro Choc에서 이렇게 썼다. "손을 뻗으면 그 에너지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어떤 예배의식처럼, 거의 종교적이었다. 맹세코 나는 그때 오르가즘에 가까운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The Palace에서 애시드하우스 나잇파티를 시작했다. The Palace의 최초의 애시드하우스 나잇파티 Jungle은 Colin Faver가 참여한 또 다른 영국판 프로덕션이었다. 덴마크의 DJ 겸 프로듀서 Kenneth Bager는 런던에서 하우스를 들으며 춤을 추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Spectrum 같은 곳에서 음악을 틀기도 했다. "에너지는 엄청났고 공기 중에는 사랑이 가득했어. 그런 특별한 함께 함은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어." 그는 그때, 그리고 이비사에서 했던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코펜하겐에 Coma Club을 열었다. Coma Club은 여전히 건재하다.

영국의 Summer of Love는 1988년에 끝나지 않았다. 1989년에도 끝나지 않았다. Summer of Love의 그칠 줄 모르는 흥겨운 모험은 1990년 말에서야 겨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파티가 계속되며 탄력을 받았다. 1988년이 Summer of Love의 해라고 한다면 1989년은 애시드하우스가 대중시장에 진출한 해였다. 애시드하우스는 전국의 웨어하우스로 뻗어나가 그 유명한 Blackburn 레이브와 런던 Orbital 아웃도어 파티를 일으켰다. 요크셔에서는 영국 역사상 최대의 집단체포사건이 벌어졌다. 1990년 7월에 열린 Love Decade에서 836명의 레이버들이 체포된 것이다. 그날 밤 디제잉을 한 Rob Tissera는 이 때문에 징역을 살기도 했다.





유산
나무처럼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 말고 Summer of Love가 남긴 진짜 유산이 뭘까? 그 당시, 세상은 한 동안 축이 기울어진 듯했고 사회는 극적으로 변화하며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보수정권은 대폭적인 삭감을 하고 있다. 빠른 속도로 유럽에서 멀어지며 크기가 줄어드는 빙산에 우리를 유배시키겠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Summer of Love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과 인종, 계급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꾸었다. Genesis의 프로모터 Wayne Anthony는 말한다. "우리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넘는 인식운동이 필요했을 거야. MDMA는 정부가 다문화주의를 위해 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일을 했어." 애시드하우스는 광고와 영화제작,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정부를 어찌나 걱정시켰던지 애시드하우스를 통제하기 위한 법안이 도입될 정도였다. 양조장들은 어떻게든 아이들이 다시 술에 입을 댈 수 있게 하기 위해 말도 안 되게 끔찍한 알코올 청량음료 알코팝(Alcopop)을 만들 정도로 공포에 질렸다. 도심이 바뀌고 심야영업허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팝음악이 소비되는 방식이 바뀌었다. 팝 자체가 변화했다.

JD Twitch는 말한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 `우리가 이 사회를 바꾸고 있어. 모든 게 변할 거야.` 그리고 어떤 면에선 실제로 그렇게 된 것 같아. 장래성 없는 직업에 매여서 자신의 삶을 증오했던 사람들이 `이런 식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지. 사람들은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도 그것을 해낸 사람이 있는지 몰랐어. 그러다가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 거야.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뀐 셈이지."





Matthew Collin은 말한다. "그게 정예 보헤미안들만이 누리던 즐거움을 사회 전체에 전해줬어. 실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류판매법이 바뀌었고, 야간경제에 연료를 공급함으로써 도심이 변화했고, 물론 마약복용을 표준화시켜줬어. 그게 가진 DIY 정신 덕분에 오늘날 엄청나고 놀라운 음악을 만들어낸 창조성의 민주화 역시 가능해졌지."

어제 일어난 이 일로, 오늘 우리는 더 나은 밝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Summer of Love의 가치는 트랜스젠더 댄서들의 권리부터 여성이 안전할 수 있는 공간에 이르기까지 클럽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젊은 클러버들의 세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의 행동주의는 여성 DJ들의 급성장에도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서 오늘날 일부 페스티벌은 DJ 섭외 시 양성을 동등한 비율로 부킹하는 정책을 지키고 있다. 1988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JD Twitch는 지금도 여전히 열정적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사운드를 가지고 있어. 역대급의 DJ들이 존재하지. 기술의 발전 덕분에 디제잉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지." 이제 그것을 지원하고 지지하기 위해 1980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던 문학단체가 생겼다.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는 대학과정이 생겼고, 일렉트로닉뮤직에 특화된 음향공학모듈이 생겼다. 우리의 세계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시베리아 여성이 브라질의 축제에서 디제잉을 한다는 것은 1988년에 제트팩을 매고 레이브를 하는 것만큼이나 근사한 일이고, 이것은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초기 개척자들이 다져준 발판을 디디고 세계적인 씬을 만들어가고 있으며 인터넷 덕분에 모두가 여기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네덜란드와 크로아티아, 싱가폴, 샌프란시스코, 호주,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환상적인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Creamfields Santiago의 시작은 본래 리버풀의 작은 싸구려 술집이었다. 오늘 우리의 파티는 1988년 때처럼 혁명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때와 동등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Summer of Love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클럽과 페스티벌의 지도가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파문을 그려내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번 보자. 거대한 스마일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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