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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Vonstroke와 미국 댄스뮤직의 미래
VonStroke의 미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글: Michaelangelo Matos 사진: Leila Fakouri | 2018-12-13
DJ 겸 프로듀서 Claude VonStroke와 그의 임프린트 Dirtybird는 EDM 붐 이후 미국의 댄스뮤직이 지속 가능하고 믿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 서 왔다.

LA부터 디트로이트까지 이어지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Barclay Crenshaw는 기운이 넘쳐 보인다.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 오늘밤부터 앞으로 4주간 공연일정이 꽉 차 있다. 하지만 압박을 받는 기색은 없다. 오히려 행복에 잔뜩 겨운 모습이다.

Claude VonStroke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Crenshaw는 변칙적이면서도 친숙한 하우스뮤직의 마에스트로이며, 레코드 레이블과 이벤트프로모션, 온갖 굿즈를 아우르는 Dirtybird Records의 수장으로서 즉각적인 신뢰를 주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기대감을 안겨주는 존재감을 가졌다. 그의 팬층은 날로 두터워지고 있다. 현재 Dirtybird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이리어(San Fran Bay Area), 플로리다(Florida), 시카고(Chicago)에서 매년 페스티벌을 열고 있으며, Get Real로 백투백을 공연 및 프로듀싱하는 Crenshaw와 Curtis Jones의 Green Velvet의 12월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호주에서 비행기에서 내리다가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마이애미 Winter Music Conference에서 또 다시 우연한 같은 일정으로 재회하게 되면서 재미 삼아 함께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다. Crenshaw가 말한다. “우리 둘이 4시간 반, 5시간짜리 공연을 했는데 정말 쉬웠어. 나는 백투백을 정말 싫어하는데도 말이야. 다른 DJ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는 의도로 시작한 건 아니었어! 그런데 마치 ESP 같았어. 우린 (덱에서) 내려오라는 말을 들어야 할 정도였지.” 두 사람은 라스베이거스의 한 힙합클럽 VIP석에서 즉흥적인 모임을 열었다 “샴페인도 갖다 놨었어.” Crenshaw가 웃음을 터뜨린다. “진짜 엉뚱했지.”

Barclay Crenshaw는 1971년에 산업 중서부 중심지인 오하이오의 클리블랜드 하이츠(Cleveland Heights)에서 태어나 12살 때 디트로이트로 이사했다. 그들은 그로스포인트(Grosse Point)에 살았는데, Crenshaw는 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프레피핸드북(Preppie Handbook)’ 시대의 한 복판에 빠져 있었어. 다들 칼라를 세우고 다녔고, 페니로퍼가 유행이었어. 난 ‘악, 진짜 최악이다’ 싶었지.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15살이 된 그는 비트를 만들 줄 아는 친구와 함께 네 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우리 동네 피자가게에 관한 랩송" 테이프를 만들었고,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녹음 스튜디오`를 물색했다. 가장 눈에 띄는 광고는 Juan Atkins의 레이블 Metroplex, 말 그대로 테크노의 토대를 이루는 곳이었다. Crenshaw와 그의 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이스트 디트로이트까지 약 1.6킬로미터를 이동했다. “그쪽 반응은 이랬어. ‘랩테이프는 나쁘지 않네! 그런데 우리가 너희를 데리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여기서 만들고 있는 걸 들려줄게’.” 그들은 Atkins가 Model 500라는 이름으로 낸 명곡 ‘Technicolour’를 틀어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Crenshaw는 이 음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뉴욕 로체스터(Rochester)에서 대학을 마친 Crenshaw는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그가 첫 번째로 구한 일자리는 `제대로 미친` 감독 Lee Daniels의 무급인턴이었다. “아리 골드(Ari Gold)를 생각하면 돼. 온갖 갑질을 다 당했지.” 1997년, 그들 중 한 명은 Bruce Willis 의 범죄드라마 The Jackal (1997)의 감독 Michael Caton-Jones를 도와 일렉트로닉 배경음악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LTJ Bukem을 들었어.” 이를 계기로 Crenshaw는 Chemical Brothers 스타일의 빅비트로 드럼앤베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관련업으로 지칠 대로 지쳐가는 중이었다. “진짜 심했어. 하루 중 18시간을 이쪽 저쪽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 들어야 했으니까.” 오히려 Caton-Jones는 Crenshaw의 미래를 그 자신보다 분명하게 내다 봤다. 그는 Crenshaw의 Jackal 포스터에 사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음악 쪽으로 한 번 잘해보게.”

디트로이트에 돌아온 Crenshaw는 지역 자동차광고가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보다 벌이가 더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Niki’s Pizza 위층 널찍한 방에 살 곳을 마련했고, 그의 룸메이트는 Poorboy 크루인 자신의 친구들이 여는 파티에 그를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Crenshaw는 결국 그 파티에서 인생 최초로 공연을 서게 되었다. “불법 레이브의 D나 E룸에서 Nord Modular로 라이브셋을 했지.” 대중의 기호를 정확하게 반영한 셀렉션은 아니었다. “다들 ‘누가 미시간에서 정글을 하냐’고 했지. 사실이 그랬어. 아주 작은 바들 몇 곳에서 정글을 틀었는데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은 정글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Crenshaw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파벌이 아주 난공불락이었어. 어디에도 낄 수가 없었어. 그 즈음 정글은 진짜 다크해지기 시작했고, 문득 보니까 관중들 중에 여자는 아예 없더라고.” 이내 그는 디제잉을 하는 바텐더들인 Justin과 Christian Martin 형제와 친해졌다. “걔네는 여자들만 잔뜩인 파티들에 갔어. Naked Music, 서부해안 스타일의 하우스, 매끄럽고, 보컬이 들어가는 사운드 있잖아. 난 그게 질색이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파티에만 있는 걸 어떡해. 그래서 그들의 서부 해안풍 하우스트랙에다가 흙탕물을 약간 튀겨줬지.” 그가 웃는다. “사운드를 약간 갈아주고 보컬을 죄다 빼버렸지.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역대 최악이다’.”

2003년, Crenshaw는 일요일 오후마다 Golden Gate Park에서 Martin 형제, Worthy (Sean Williams), J Phlip (Jessica Rose Phillippe)와 함께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Christian은 (예술인집단인) Moontribe 덕후였어. 산꼭대기든,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든, 파티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는 사람들이었지. 난 Packard Plant가 한계였어. 발전기 한 대만 가지고 모하비사막 한복판에 나가서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3일 동안 사막에 갇혀본 적 있어? 난 ‘야, 너네 진짜 미쳤다’고 했지.”

그러던 중 Crenshaw는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 출신 Aundy를 만나 2005년에 결혼했다. 두 사람은 Haight Street에 신혼집을 차렸다 2008년에 딸 Ella가 태어나고 이듬해에 아들 Jasper까지 낳게 되면서 좀 더 한적한 도시인 샌엔셀모(San Anselmo)로 이사했다. “아내는 날더러 ‘어떻게 돈도 안 받고 사방팔방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일요일마다 이 집을 나설 수가 있지’라고 말했어.” 하지만 사실 그녀는 Crenshaw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Aundy는 말한다. “Crenshaw는 뭐랄까, ‘내가 좀 도와줘 볼까’ 하게 되는 소소한 프로젝트 같았어.”

Crenshaw는 말한다. “Aundy가 이런 말을 했어. ‘내가 1년 동안 집세를 책임질 테니까 당신은 당신 일 해. 그리고 만약에 일이 잘 돼서 5만 달러까지 벌 수 있게 되면 평생 해도 돼. 대신 그렇게 못 벌면 다른 평생직장을 찾도록 해.’ 내가 들어본 중 가장 동기부여가 되는 말이었어. 진짜로.” 그는 돈을 모아 네 장의 12인치 음반을 냈다. Dirtybird #3인 Claude VonStroke’s ‘Deep Throat’는 바이닐 카피만 1만4천장이 팔렸다. 기록을 세우기 위한 기다림 끝에, 32살의 Crenshaw는 계획보다 일찍 목표를 달성했다.





5년 전, Crenshaw는 가족과 함께 LA로 이사한 상태다. EDM 열풍이 미국에 막 불어 닥치기 시작한 때였다. 오늘날 EDM은 이상하게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시대이지만 Dirtybird는 번영하고 있다. Dirtybirh의 디지털 구독서비스 Birdfeed는 구독자 기반이 2천 명에 달한다. 열성팬들은 한 달에 6.99달러(약 8천원)를 내고 티켓할인과 익스클루시브 음악을 즐긴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500명 정도씩 구독자가 생기는 Crenshaw가 한 곡 한 곡 엄선한 50개의 미공개 트랙을 구독자들에게만 풀었다. “팬들은 우리 음악을 진짜 좋아하는 경우거나, 다른 노선에서 갈아타는 경우야. ‘Calvin Harris 듣다가 왔음’ 이런 식이지. EDM을 듣다가 이쪽으로 돌아선 거야. 되게 안 믿겨지긴 한데, 개중에는 아주 대단하신 분들 음악을 듣다가 돌아서서 오는 경우도 있어. 중간통로라고 할 수 있지.”

Dirtybird 사운드와 DJ로서 Claude VonStroke의 사운드는 물론 세월을 타면서 변화해왔지만 그 뿌리가 고수하는 것은 분명하다. 깔끔한 라인의 테크하우스에 레이저 같은 베이스라인의 레이어, 묵직한 하이햇, 간간히 첨가되는 짤막한 캐치프레이즈다. Crenshaw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 드럼사운드일 필요는 없어. 난 퍼커션이 아닌 퍼커션도 많이 써. 엉뚱한 곡을 만들더라도 프로덕션을 기가 막히게 하는 거야.” 디테일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찰지 몰라도 그런 유쾌함이야말로 Dirtybird의 포퓰리즘이 먹히는 비결이다. Crenshaw와 그의 동료들은 훅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한반복하진 않는다. 그런 상스러운 구석기시대 스타일은 EDM이 하는 거니까.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서 나온다. Dirtybird의 음악정신은 진보적이고 포용적이다. “난 댄스플로어에 책임을 느껴. 틀기 좋은 음악이 아니라면 만들고 싶지 않아.”

Dirtybird는 오랫동안 실질적인 일인기업이었다. 이후에 Crenshaw는 직원들을 고용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아내도 있었다. Aundy는 말한다. “내가 원래 늘 옆에서 마케팅이나 브랜딩에 대해서 조언을 해줬었거든.” 마침내 Crenshaw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 팀에 꼭 들어와줬으면 해.” 오늘, Crenshaw는 말한다. “Aundy는 Dirtybird의 COO이자 CMO로 이벤트와 레이블, 의류사업을 운영하고 있어.” Aundy는 말한다. “Claude VonStroke가 딱 필요할 때 내가 합류하게 되었어. 밸런스를 잡는 게 쉽지 않지. 주중에는 저녁 6시 이후에 사업얘기를 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했어. 진짜 어려워. 걸핏하면 왜 규칙 어기냐고 서로 지적을 해.”

아무튼 결과는 확실했다. 10월 5일부터 7일, 제 4회 Dirtybird Campout이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열렸다. 이번 장소는 Modesto Reservoir였고, 행사는 순탄하게 마무리되었다. Crenshaw는 말한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엄청 친근하더라고. Campout에서 사람들이 지갑을 주우면 분실물취급소에 갖다 주는 거야. 서로서로 보살펴줬어.”

그건 관중들만이 아니었다. Ghostly의 Sam Valenti는 말한다. “Matthew Dear가 작년 Campout에서 공연을 했는데 진짜 끝내주는 시간이었거든. Barclay가 잘한 일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탄생시킨 거야. 댄스뮤직의 여러 가지 다양한 가닥을 하나로 꼬아내면서도 디트로이트만의 거친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어. 진지하지만 점잔을 빼진 않아.”





한 달 전인 9월 8일, Crenshaw는 자신의 라디오쇼의 야외블록파티인 첫 번째 Birdhouse Festival을 감독했다. 4주 만에 티켓이 매진되고 4천5백 명이 몰려들었다. 4천5백이라고 하면 대규모축제라고 할 수는 없는데, 바로 그게 목적이었다. “나는 3만 명 규모 공연을 한 번 할 바엔 1만 명 규모 공연을 세 번 하겠어. 그 편이 바이브가 훨씬 좋거든. 3만 명 페스티벌 한 번 하는 게 돈은 훨씬 더 벌지. 그런데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미국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프로모터가 Crenshaw 혼자는 아니다. 물론 메가페스티벌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매년 열리는 Electric Zoo와 EDC를 비롯한 여러 대규모 페스티벌이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나 벤처캐피털 회사인 SFX가 10억 달러를 들여 가며 EDM 기업들을 먹어 치우자 곧 바로 거품이 터지면서 수많은 페스티벌과 투어가 너나 할 것 없이 실패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Crenshaw는 말한다. “페스티벌을 처음 열 때는 라인업에 5백만 달러씩 쓰면 안 돼. 차근차근 키워가야지. 팬덤이 뚝딱하면 저절로 생기나? 우리가 직접 얻어내야 하는 거야.”

Dirtybird의 이벤트는 새롭고 짜릿한 친밀감의 끝을 달린다. 이런 친밀감이 앞으로 미국, 그리고 세계의 댄스뮤직씬을 휩쓸게 되는 것이 모두의 염원이다. Crenshaw의 회사는 몇 안 되는 다른 이벤트들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가을에 크로아티아에서 Ship Fam과 했던 공연 역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난 그게 역사상 가장 비체계적인 파티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대급으로 체계적이고 정교한 파티였어.”

October Campout에는 모하비사막에서 탄생한 Desert Hearts 페스티벌의 배후에 있는 4인조인 Desert Hearts가 출연했다. 올해 그들의 이벤트에는 3천5백 명이 참석했고, 작년에는 CVS 셋이 등장하기도 했다. 공동설립자인 Lee Reynolds는 최근 Billboard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Desert Hearts를 벤처사업으로 시작한 게 아냐. 우린 돈을 세는 씬 뒤에 숨어있는 게 아니라 댄스플로어 위에서 즐기고 있잖아.” 하이라이트로 손꼽히는 한 가지는 그들이 매년 댄스플로어에서 와인과 치즈를 서빙하는 이벤트다.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열리는 샌디에이고의 CRSSD Festival도 하우스와 테크노, 라이브 일렉트로닉을 넘나드는 메이저 페스티벌 전문 아티스트들(9월 29일, 30일에 열렸던 에디션에는 Helena Hauff와 Bob Moses, Nina Kraviz가 출연했다)로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2015년, 그 CRSSD의 첫 번째 에디션을 빛낸 아티스트가 Dirtybird의 J Phlip이었다.

CRSSD를 주최하는 샌디에이고의 크루 FNGRS CRSSD는 스시음식점을 클럽으로 리모델링한 Bang Bang에서도 파티를 연다. 1만5천 명이 몰리는 CRSSD 페스티벌과 대조적으로, Waterfront Park에 있는 이 자그마한 공간은 친밀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같은 슈퍼프로모터도 Secret Project 같은 소규모 이벤트에 전력을 다 하고 있다. Crenshaw는 말한다. “뭔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관중이 불과 5천 명이어도 갔던 거야.”



"산꼭대기든,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든, 파티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는 사람들이었지"



그는 씬 자체와,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전시키는 것에 있어서 의욕이 넘친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아이디어 하나를 놓고 작업을 하려고 노력을 해.” 최근 한 시간관리 코치가 그에게 “6주 동안 아이디어 하나에만 몰두하는 것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게 좋은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냥 비트를 100개 만들어라. 하루에 한두 개씩 만들어서 폴더에 모아놓고, 자주 들여다 보다 보면 어떤 게 좋은 건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설득한 적이 있다. “요즘 그렇게 하니까 좀 되더라고.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작업해본 적이 없었거든. 원래는 트랙을 10개 만들면 그 10개를 다 썼어. 이제는 하나를 만드는데 30개씩 만들어.”

그는 Claude VonStroke 외에 다른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 2016년에는 그의 말마따나 ‘힙합이라고 한다면 힙합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활동명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사실 다른 활동명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자신의 본명 ‘Barclay Crenshaw’를 그대로 활동명과 앨범 타이틀로 썼다. `The Gene Sequence` 같은 트랙들은 재기넘치는 신스가 차갑고 빈티지한 Aphex Twin의 좀 더 직설적인 버전처럼 달리고, ‘The Baddest’에서는 통통 튀는 808 그루브로 랩그룹 Pink Dollaz 출신인 캘리포니아의 트윈 Cam과 China, 그리고 Inglewood의 랩을 받쳐준다. 그는 말한다. “퓨처베이스/힙합이야. 90년대 힙합 트랙들과 Eprom 트랙들을 틀어.”

프로모터로서의 성공 면에 있어서는 Crenshaw가 처음에는 자신의 고향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인 Movement에 섭외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2001년에 Movement가 아직 DEMF라고 불리던 시절인 제 2회 에디션부터 함께 하기 시작했다. “나를 부킹하게끔 그들을 설득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내 부킹에이전트를 자를 태세였지. ‘이 망할 페스티벌에 나 못 꽂아 넣기만 해봐.’ 그러면서. 근데 뭐, 너무 좋았어” 지금이야 여태까지 Movement에서 10번이나 공연을 했다. 전형적인 VonStroke 셋보다 좀 더 단도직입적인 테크노였던 올해의 셋은 녹음되어 `Live From Detroit`로 발매되었다. “우리가 150트랙을 라이선싱했는데 내가 25트랙 정도를 틀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량이 주어져 있었어. 그렇다고 그 믹스들 중에 하나라도 망쳐놔도 되는 건 아니었지.”

Movement 애프터파티에서 이뤄진 만남 덕분에 Crenshaw는 Detroit Pistons의 팬으로서의 삶에 대한 인터뷰를 촬영하게 되었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농구장 투어를 받기도 했다. 이내 그들은 CVS 하프타임 DJ셋을 준비하게 되었다. 총 시간은 무려 5분. 경기를 이틀 앞 둔 날, 그가 말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해온 중 가장 이상한 셋이 될 거야. 그쪽 스타일과도 약간 다를 거고. 근처 교외에서 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건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뭘 하는 건지 감도 못 잡을 거야. 아주 악몽 같을 걸. 어쨌든 난 할 거지만.”



“페스티벌을 처음 열 때는 라인업에 5백만 달러씩 쓰면 안 돼. 차근차근 키워가야지. 팬덤이 뚝딱하면 저절로 생기나? 우리가 직접 얻어내야 하는 거야”



Crenshaw가 가족과 함께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아들 Jasper가 외친다. "여기가 학교보다 훨씬 좋다!" 기술팀은 하프코트에 DJ 스탠드와 형광등 조명으로 에워싼 `부스`를 준비하고, Crenshaw와 Aundy, Tia는 경기장 코트 옆 좌석에서 여러 가지 관리업무를 처리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Crenshaw는 우리를 자신의 옛 홈그라운드인 Niki’s Pizza로 데려간다. 우리는 두툼하게 나오는 시카고스타일이 아닌 디트로이트 스타일 피자를 두 판 주문한다. 그가 말한다. "이거 새벽 3시에 먹으면 맛이 진짜 기가 막히거든."

경기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Crenshaw의 부모님을 만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이 그려진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고, 아버지의 티셔츠에는 번개모양으로 금이 간 파스텔 색 알이 그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한다. “Barclay가 대학에 다닐 때, 얘는 강의를 10개씩 듣다가 교수가 마음에 안 들면 중도에 그만두곤 했어.”

경기가 한창 진행되는데 누군가가 16번째 줄에 앉아있는 팬 한 명을 발견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Dirtybird 굿즈로 감싼 20대 중반의 이 팬의 이름은 Josh다. 마지막으로 Claude VonStroke를 본 개 Majestic Theater 공연 때라고 한다. 그의 친구도 이날 경기에 오고 싶어 했지만 일을 빼지 못 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다. “걔한테 ‘Claude가 하프타임 때 공연을 한다니까? 우리 진짜 꼭 가야 돼’라고 말했는데..” 그는 이날 경기에 온 보상을 톡톡히 받았다. 자신의 우상이 자기 자리를 방문했으니.

경기장의 인하우스 DJ가 Daft Punk의 ‘Robot Rock’과 함께 VonStroke를 소개한다. 치어리더들이 네온조명을 설치하자 경기장 위쪽 스크린에서 짤막한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오고, 영상 속 Crenshaw가 활짝 웃는다. 그 아래 덱에서는 난리가 났다. 30초 정도, CDJ에 전원이 바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스탭들은 순간 당황하지만 다행히 관중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의 셋은 이례적이다. Crenshaw가 Dirtybird의 최대 히트곡 10곡을 짜맞춘다. 그가 오프닝으로 선택한 트랙은 Breach의 ‘Jack’. 두 메이저 레이블 사이에 입찰경쟁을 촉발시켰던 곡이다. Atlantic이 이겼지만. Curtis Jones의 또 다른 활동명인 Cajmere의 VonStroke 리믹스 ‘Percolarot’도 흘러나온다. 클라이맥스는 2006년에 발매된 Dirtybird의 다섯 번째 작품 ‘Who’s Afraid of Detroit?’다. Claude VonStroke에게 명성을 안겨다 준 트랙이다. 셋이 진행되는 내내 Crenshaw는 쉴 새 없이 바운스를 탄다. 아드레날린 러쉬가 제대로 온 모양이다.

이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들었던 것 중 제일 좋았던 피드백은 Jasper가 와서 이렇게 말한 거야. ‘아빠 춤을 너무 많이 췄어’ 아들한테밖에 들을 수 없는 말이지.” 그러더니 아마도 그 누구보다 열렬히 미국 포스트 EDM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을 이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내 음악적 커리어는 해가 다르게 이상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Claude VonStroke와 Green Velvet은 이번 12월부터 Get Real 미국투어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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