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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Mills: 끊임없이 펼쳐지는 공상과학 스토리
DJ, 프로듀서, 뮤지션을 초월한 Jeff Mills
글: Joe Muggs 사진: Alexa Merico 스타일링: Yaya Ni 그루밍: Jenny Dyson 컨셉: Jeff Mills | 2019-03-25
"1990년대 중반,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베테랑 레이버들이 공감하는 말이다. 하지만 Jeff Mills에게 있어 이 시기는 단순히 흐릿하기만 한 세월이 아니다. 거대한 디스토피아적 레이브 소굴 Printworks의 관중을 아무렇지 않게 전멸시킨 바로 다음 날, 런던 중심가의 한 초호화 호텔 바에서 만난 55세의 Mills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 받는 테크노 뮤지션이자 DJ에서 그 이상의 존재로 간단하게 (너무도 간단하게!) 올라서버린 그 순간에 대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일렉트로닉뮤직뿐 아니라 미술, 건축, 영화, 재즈, 우주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상과학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axis 레이블을 세우고 Jeff Mills라는 존재성 자체를 개념예술 프로젝트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공상과학 스토리에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인 1993~4년이었다. 그가 설명한다. “어쩌면 너무 멀리 와서 돌이킬 수 없겠다는 깨달음이 왔어. 이 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은 거지. 굉장히 좋았던 시간들이지만.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 음악과 미술을 좀 더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었어.”

사실 자신의 일에 진지하지 않은 Mills의 모습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실제로 만나본 그는 역시나 정중하고, 열정이 넘치면서도 행동습관에는 너디(nerdy)한 긴장감이 있다. 눈 깜박임이 잦고,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정정하며, 딱 맞는 다음 구절이 생각날 때까지 한 단어를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또한 중서부 특유의 느린 말투를 쓰는 Mad Mike Banks나 Carl Craig 같은 동료 디트로이트 뮤지션들과는 달리 Mills의 똑부러지면서도 부드러운 말투는 거의 캐나다 억양에 가깝다(어쨌든 디트로이트는 온타리오에 인접해있긴 하다). 그가 테크노의 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독특하게 물든 흰머리와 집요하고 밀도 높은 대화스타일만 보고 성공적인 학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딘지 모르게 펑키한 기하학적 프린트 티셔츠만 보고 일곱 살 때부터 드럼을 쳐온 재즈 뮤지션으로 볼 수도 있겠다.





Mills의 어린 시절은 음악, 스케이트보드, 공상과학, 이 세 가지로 압축된다. 육남매 중 다섯 째인 그는 디트로이트 중 게토도, 교외도 아닌 `매우 평범한` 지역에서 자랐다. 디트로이트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모두가 흑인들로 구성된 곳이었다. 다만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다는 건 말이지... 마치 그런 거야. The Supremes가 저쪽에 살고 있고, Diana Ross는 이쪽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어디서 Marvin Gaye가 뭘 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누가 Motown하고 뭘 했는지, 아니면 P-Funk를 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야. (The Temptation의) David Ruffin의 딸 Nedra는 학교에서 내 앞자리에 앉았어. 키가 굉장히 커서 내가 선생님을 보려면 몸을 옆으로 기울여야 할 정도였지!” Mills는 Duke Ellington과 합주를 한 경험이 있는 드럼선생님을 만났고, 이내 학교 밴드의 멤버가 되었다. 그는 댄스파티나 행사에서 드럼을 쳤고, Steely Dan부터 Kiss, 당시 유행하던 펑크와 팝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Mills는 대형 페스티벌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형 덕분에 종종 장비를 조작해보았고, 심지어 공연 조명을 직접 가동해보기도 했다.

길거리에서는 주로 스케이트를 탔다. 70년대 디트로이트에는 스케이트장이 없었지만 Mills의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스케이트를 타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며, 프로 스케이트 선수 Tony Alva를 인용했다. "잘하기도 해야 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해야 하거든." 공상과학과 만화책도 Mills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그가 말한다. "미 중서부는 기차를 통해 모든 것을 운송하는 중심지였어. 그 중에는 싸구려 통속소설도 있었지. 그러니까 우린 모든 걸 다 가졌던 거야! 디트로이트, 시카고, 클리블랜드, 오하이오, 위스콘신은 모두 아직도 전국 최대 규모의 컬렉터들을 보유하고 있어. 그리고 우주여행의 모든 것, 미래에 대한 상상이 디트로이트에 있었지.”

하지만 그가 디제잉을 발견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디트로이트에는 고등학생들을 위한 정식 댄스파티가 프라이빗하게 기획되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Mills의 누나는 Mills가 열두 살일 때부터 그를 파티에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댄스플로어에 대해 배웠어. 또 DJ가 뭘 하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또 여자애들을 어떻게 꼬시는지. 열두 살짜리한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말이 학생파티지 성인들을 위한 클럽에서도 플레이하는 DJ들이다 보니 음악수준이 높았다. 디트로이트에서 그 말은 디스코, 딥 펑크, 특히 몽롱하고 일렉트로닉한 톤을 의미했고, 70년대 후반 들어서는 ‘프로그레시브’라고 하는 장르를 점차 포함해갔다. 프로그레시브는 Cerrone, Telex, The Human League, 그리고 무엇보다 Kraftwerk 같은 유러피안 신스 디스코와 신스 팝이었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힙합일렉트로였고, Mills는 새로운 DJ 테크닉과 함께 자신의 소명을 찾았다. 하지만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컷과 스크래치를 배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땐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웠어. 영상도 없고, 그냥 어떤 DJ가 뭘 했느니, Marley Marl이 뭘 했느니, Red Alert가 뉴욕에서 뭘 했느니 이런 것들을 소문을 통해서 듣게 될 뿐이었어. 그냥 역설계를 하면서 그들이 믹서로 뭘 했을지 직접 깨우쳐봐야 했지.”

그는 학습이 빨랐다. 그 자신은 스케이트보드를 통해 익혔다는 스타일 감각과 `Billy Cobham, Neil Peart, Buddy Rich 등 재즈 드러머들과 퓨전 드러머들을 보면서` 배운 스피드와 정확성을 가진 Mills는 빠르게 유명세를 쌓았고, `The Wizard(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80년대 들어서서 Juan Atkins, 그 다음엔 Derrick MayKevin Saunderson 이 일렉트로닉 펑크에 대해 굉장히 고유한 디트로이트식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것을 펼쳐 보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던 The Wizard는 1987년부터 클럽들과 라디오에서 랩, 디스코, ‘프로그레시브’와 함께 그 사운드를 선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테크노라고 알려지게 된 이 사운드를 발명하는 동안 그 자신의 첫 번째 음악적 실험은 좀 더 어두웠다. 그는 자신의 누나가 사는 시카고를 자주 방문했는데 자신의 셋에 넣을 하우스뮤직을 고를 때 레이블이자 레코드샵인 그 유명한 Wax Trax!를 종종 찾아갔다. Ministry 같은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의 본거지였다. Mills는 Throbbing GristleSkinny Puppy 등 인더스트리얼의 광신도가 되어 있었다. “올블랙 차림에 백팩을 매고, 알잖아. 커다란 부츠까지 뭐 하나 빠뜨린 게 없었어!” 그가 Anthony Srock과 함께 한 첫 번째 밴드 Final Cut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유럽적이고 시끄러운 사운드를 구사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길, 그가 Mad Mike Banks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펑크밴드에서 멜로딕한 하우스를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를 이쪽 스타일로 전향하게끔 설득했어. Underground Resistance가 좀 전투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뿌리가 인더스트리얼이기 때문이야.”

펑크와 인더스트리얼의 공격성이 만난 바로 그 곳에서 Underground Resistance는 마법의 공식을 발견했고, 그들은 Robert Hood를 MC로 내세운 채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Members Of The House와 Yolanda와 협업한 초기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Jeff와 Mike 둘 다 여전히 피아노를 많이 쓰고 가스펠의 영향을 받은 정통 하우스를 좋아했지만 그들은 이내 좀 더 거친 트랙에 유럽이 열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Mills는 이 사실을 아주 어렵게 깨우쳤다. 베를린의 Tresor를 첫 방문했을 때, 그는 시카고 하우스 고전들과 디트로이트 음반들을 준비했지만, 플로어의 반응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그때 분이 가득 차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떻게 Chip E를 안 좋아할 수 있어? 어떻게 Farley Jackmaster Funk를 안 좋아할 수 있으며, 어떻게 Steve Hurley를 안 좋아할 수 있냐고?” 그리고는 두 번 다시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결국 요청에 못 이겨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엔 애시드와 Kraftwerk, 그 자신과 Banks의 하드한 실험작들을 가져갔고, 그는 그 즉시 디트로이트에 있었을 때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레이브 붐의 열기 속에서 순식간에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UR은 90년대 초 동안 인정사정 없이 강렬하고, 소울 넘치며,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만 같은 환상적인 튠들을 잔뜩 쏟아냈지만 Mills는 디제잉을 위해 세계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의 공상과학의 꿈이 현실화되는 것만 같이 느꼈다. "도쿄에 있을 때 밤에 비가 내렸는데 얼마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같았는지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어!" 그는 자신이 여행한 각 나라들간의 공통점을 찾아내기 시작했고, `매우 보편적인 사운드`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 레이브관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사람을 필요로 했던 그 유명한 Limelight 클럽의 러브콜을 받아 뉴욕으로 이사했다가 시카고로 옮겨 가서 건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가 웃음짓는다. “시카고의 서점들 중에는 건축학적으로 언더그라운드스러운 곳들이 있었어. 희귀한 책들을 보려면 문을 두드려야 했거든!”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그의 삶이 그저 12인치 레코드판의 반복, DJ 공연의 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며 그 자체로서 공상과학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결단의 순간이었다. 그는 차근차근 UR을 Banks에게 맡겼다. Banks는 UR을 확장했고 레이블의 초점을 디트로이트에 맞춘 채 지역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거점을 만들어갔다. Mills는 이미 Axis를 꾸려나가던 중이었고 미니멀리즘 미술과 건축에 영감을 받아 Rob Hood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음악을 거의 무의 지경까지 벗겨내는 것... 다른 것들을 다 제하고 공통의 요소만 남겨놓는 걸 하고 있었어. 그러면 매우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 모든 걸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으니까.” 그 결과, H&M과의 컬래버레이션, Axis에서 발매한 Hood의 걸작 `Minimal Nation`, 가히 완전무결한 Mills의 앨범들 ‘Cycle 30’, ‘Growth’, ‘Purpose Maker’가 탄생했다. `마이크로폼 레코딩 테크닉과 신서사이저 개조 등 온갖 것들을 실험하면서` 그는 아주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미래적인 사운드의 톤들을 만들어냈다.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한 음색과 패턴을 짜 넣은 그의 튠들은 지구상의 그 무엇보다 강렬한 사운드로 레이브를 강타했다. Mills의 작품의 메시지와 아트웍은 마치 암호 같았는데, 그는 초기 웹사이트의 가능성을 활용해 이 힌트들을 더 큰 퍼즐로 연결시켰다. 그는 모든 트랙과 모든 행동을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디제잉 스킬조차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미니멀리즘한 음악을 구사하는 그의 믹싱은 더욱 와일드해졌고, 더욱 맥시멀리즘해졌으며, 더욱 즉흥적인 스타일이 되었다. 그는 여러 대의 덱을 놓고 한 대의 909 드럼머신에서 기관총을 쏘듯 패턴들을 난사했다. 한참 흐름을 탄 Mills를 보면 그의 음악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레코드판이 날아다니고, 스핀백과 트릭이 난무하는 순전한 카오스이면서도 어째선지 그루브가 살아있는 그런 광란에 빠뜨리는지 알 수 있다. “맞아!” 그가 열변을 토한다. “혼돈의 끝자락, 혼돈의 문턱에 있어. 의도적인 거지만. 그러니까 나는 푸시(push)하고, 또 푸시하는 거야.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말이지. 아니면 벼랑 끝에 서보는 거야. 모르겠어. 다음엔 뭘 플레이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 한 번 해보고 제대로 된 사운드가 나올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그것도 가끔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모르면 다른 사람들은 확실히 모른다는 거고, 바로 거기서 드라마와 서스펜스가 생겨나거든. 이건, 그러니까 이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과 비슷해. 그걸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일단 해보는 거야. 그리고 매번 할 때마다 점점 나아지다가 결국에는 Tony Hawk처럼 되는 거야... 그래!”

이 조각들이 모두 제자리에 놓이면서 Mills는 우주공간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안정된 경로를 갈망했다. 그가 해낸 작업량은 어마어마하다. 그 전부가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건 아니지만 그는 언제나 탐구하고, 언제나 더 큰 비전을 향해 반짝이는 단서들을 만들어낸다. 2000년에 그는 Fritz Lang이 1927년에 낸 기념비적인 공상과학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의 영화음악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20여 편의 영화음악을 썼다. 2006년에는 몽펠리에 교향악단(Montpelier Philharmonic Orchestra)와 함께 `Blue Potential`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댄스뮤직을 오케스트라 형식으로 리워크하는 요즘 트렌드보다 시대를 훨씬, 훨씬 더 앞선 것이었다. 그는 늘 디제잉을 했다. 디제잉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맥박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몇 년 간은 클럽업계와 거리를 두면서 순수하게 일상적으로 디제잉을 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업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베를린중심의 미니멀의 지배를 혐오했다. 그는 그것을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말한다. “의식적이었는지, 무의식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일렉트로닉뮤직에 어떤 계층구조를 만들고 있었어. 편가르기를 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게 싫었고.” 그는 그 시기 동안 MilesColtrane의 음악을 듣고, 과학서적과 공상과학서적을 읽으며, `꼭 리스너나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음악적 코드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별들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음악인 거지."





Mills가 자신의 레퍼토리에 라이브음악을 다시 추가했다는 점에서 재즈로의 회귀는 확실히 큰 이득이었다. Mills는 Billy Cobham, Rush, Steely Dan를 듣던 시기를 상기시키는 재즈 퓨전밴드 Spiral Deluxe도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나이지리아의 아프로비트의 레전드 Tony Allen (78세인 그가 세계 최고의 드러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과의 듀오 프로젝트도 있다. Mills는 이 프로젝트에서 909를 다루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계발해냈다. 모든 드럼이 각각의 음을 연주하도록 세팅한 다음, 볼륨컨트롤을 튕기면서 그것을 플레이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하니 더 이상 시퀀서 그리드에 얽매이지 않고 드러머 한 명 한 명과 진정한 즉흥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이야. 아프로비트는 Sun Ra 등의 작품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들어. 좀 더 우주적인 작품 있잖아. 그리고 요즘엔 일렉트로닉뮤직엔 Arkestra(끊임없이 변형하는 Sun Ra의 아방가르드한 뮤지션들의 앙상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안 될 이유는 또 뭐야?”

두 프로젝트 모두 진행 중이며, 세계를 무대로 공연하면서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리고 있다. Mills는 사운드트랙 제작에서 영화제작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있기도 하다. 바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배우들, 배우들과의 인맥, 영화제작진, 장비 이런 대부분의 자원은 갖추고 있다고 봐. 파리에 사고 있으니 특정 로케이션 문제도 해결되고. 한다면 공상과학영화가 될 거야. 그런데 좀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본지가 Printworks에서 목격한 것과 같이, 테크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의 능력이다. 익숙한 모티프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에게 충격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는 그 월드클래스의 믹싱스킬,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진보적이어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조차 모르는 채,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장소에서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되어 버리는 그 음악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는 Jeff Mills의 예술의 일부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미래를 기대하고, 여전히 `클럽에 들어섰을 때 우리 주변의 것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음악이 너무나 초월적이어서 마치 마약과도 같이` 되길 꿈꾸고 있다. 20세기 초창기 기술에 대한 반응으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과 퓨처리즘이 출현했듯이, 새로운 뭔가가 오고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기술이 반란을 일으킬 거야. 기술이 우리를 소모시켜버릴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2030년 중반 정도에는 사물과 사물이 합쳐지고, 사람들이 한데 뒤섞이고, 생각과 생각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의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봐. 하드웨어는 엄청나게 축소되다가 아예 없어질 거고, 어디에서나 액세스가 가능해질 거야.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도 바뀌겠지. 지금은 대부분 즐겁고 싶어서, 편안하고 싶어서,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 음악을 듣잖아. 아마 다른 이유로 음악을 들을 때가 올 거야. 음악을 들을 때 좀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나 몰랐던 뭔가에 대한 정보를 얻는 느낌 때문이라든지 말이야.”

자신의 예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이 위대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Mills가 갑자기 거인처럼 느껴진다. 주저하며 했던 말을 되풀이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손끝으로 테크노를 구사할 때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55세의 Jeff Mills는 우리를 계속해서 미래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가이드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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