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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러브 퍼레이드 : The Sound of the Family
찬란했던 러브퍼레이드의 역사
Matthew Collin | 2016-04-05

[Altered State]의 저자 Matthew Collin이 신간 [Pop Grenade]의 독점 발췌문을 통해 베를린의 테크노 씬이 형성되던 시절인 1992년도의 Love Parade를 회상하며 그것이 어떻게 영국의 Summer of Love의 영향을 받았는지 밝혔다.





....그리고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졌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번쩍였고 우레소리가 벽을 때리며 사운드시스템의 스네어 드럼소리와 대조를 이뤘다. 어수선한 트럭의 행렬이 뷔텐베르크플라츠(Wittenbergplatz)로 이어졌다. 더욱 거세지는 폭우에 사람들은 팔을 하늘로 뻗었다. 쏟아지는 비가 마치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축복인 마냥. 트럭의 포그머신이 뿜는 흰 안개구름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깔렸다가 사람들의 손끝을 만나 기하학적 무늬를 그리며 흩어졌다. 전자 베이스가 악을 쓰고 신시사이저는 사납게 찢어지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자 관중은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그 순간만큼은 여느 나라의 국가와 다름 없는 `Der Klang Der Familie`, 패밀리 사운드다.


1992년 7월, 베를린: "밀레니얼 파티가 최고조에 달하면 무법적인 느낌이 있다." 나는 그 후 제출한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무법적인 느낌,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이 도시, 오래된 규칙은 폐기되고 새로운 규칙이 미처 정해지지 않은 이 곳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당시 Love Parade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일의 현상이었다. 그 해 1만5천여 명의 하드코어 테크노팬을 동원했는데 당시에는 경이적인 숫자였지만 7년 뒤 그 파티에 합세하는 레이버들의 수 150만 명에 비하면 소소했다.





Love Parade는 90년대 초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이제 막 통일된 국가가 자기 존재의 순전한 충만함을 한껏 즐기기 위해, 그 모든 다중도착 속의 과도한 미를 자랑하기 위해 전국에서 베를린의 명품거리인 쿠담거리(Kurfürstendamm)에 모인 집단에 불과했다. 분명 토요일의 쇼핑객들에게 약간의 충격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도시의 풍경이 단순히 상품을 사고파는 현장이 아니라 카니발, 그것도 젊은이 특유의 순수함이 지속될 수도 없었고, 지속되지도 않았던 우리의 카니발을 위한 포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해 퍼레이드의 첫 영국 사운드시스템 트럭 작동을 돕기 위해 베를린에 도착했다. Daniel Miller가 최근 시작한 NovaMute 음반사를 등에 업고 있었다. 여느 퍼레이드카에 비해 우리 차는 역간 부실했고, 저예산으로 제작된 작달막한 파란색 트럭이 쿠담거리를 따라 흔들흔들 덜컹거리며 달리는 것이었다. 트럭 위에서 흔들거리는 스피커 더미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이다!(For a lot of people, drugs work!)” 트럭에 깐 판자 위에 영국인과 독일인, 흑인과 백인으로 구성된 크루가 타고 있었다. 하드코어한 남자들은 테크노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스키니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차가 어찌나 덜컹거리는지 그들의 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퍼레이드는 꾸미지 않고 유쾌하게 허술한 구석이 있었다. 간밤에 파티를 벌이고 온 도시의 괴짜들이 무작위로 모여 이것 저것 후다닥 끌어 모은 느낌이었다. 이후에는 퍼레이드카가 굉장히 호화로워졌지만 1992년에는 아예 퍼레이드카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날렵한 흰색 리무진의 긴 보닛 위에 황홀경에 빠진 레이버들이 대자로 뻗어있던 것이 기억난다. 불타는 듯한 머리 색에 눈에 확 띄는 주황색 옷을 입은 여자가 알록달록한 마닐라 ‘지프니’ 앞에서 불을 뿜는 묘기를 하며 행진했다. 군복 차림의 별난 남자가 엔진 달린 휠체어 같은 것을 몰았고, 팬티에 부츠만 신은 한 남자는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쇼핑카트를 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롤러스케이트와 자전거를 타고 군중 사이를 헤집었다. 그때만 해도 바글거리는 관중도, 혼잡함도 없었다. 문화적 낙오자들이 토요일 오후 한창에 베를린의 주요 소비자들의 통행로에서 마구잡이로 날뛴다는 대한 왜곡된 상상의 여지가 남아있던 때였다.


좀 더 큰 트럭에 속했던 Planet 클럽의 트럭은 거대한 분홍색 만화토끼로 치장하고 있었다. 헐렁한 토끼 귀가 운전석 위로 늘어져있었다. 그런가 하면 Tanith의 트럭도 있었다. 빼빼 마른 Tanith는 원래 펑크를 하다가 하드코어 테크노로 갈아 탄 DJ였는데 최고한도까지 머릿속을 헤집는 여정에 있는 고집 센 낙오자들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펑크록 무대에 있어서 그의 감각은 완벽했다.







그의 1992년도 퍼레이드카는 지옥의 묵시록에서 긴장감 도는 정글의 수로를 따라 무섭고도 매혹적인 무의식의 세계로 여정을 떠나는 Martin Sheen의 경비정을 닮았다. 한 가지 차이라면 Rolling Stones 대신 폭탄급 테크노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위장과 그물하며, 마치 탱크처럼 치장했다. DJ는 포탑에서 부대를 이끄는 정신이상의 군사령관 같았다. 베이스드럼이 강하게 울리자 DJ의 전우들이 주황색 연기를 뿜는 조명탄을 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군국주의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려던 참에 전투장비 차림을 하고 있던 돌격대원 중 한 명이 뒤돌았다. 그의 등에는 평화의 기호가 칠해져 있었다."


평화의 돌격대원은 베를린 테크노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듬해, Tanith는 그보다 더 나아갔다. 어디서 구했는지 해체된 소비에트 탱크를 타고 Love Parade에 참가한 것이다. 그때부터 Tanith가 잔뜩 위장을 하고 러시아제 거대괴물 꼭대기에 서서 자신의 돌연변이 크루에 자신의 음악의 주문을 걸기 위해 혼령이라도 불러내는 듯 부두교 해골을 하늘 높이 들어올린 모습이 그를 상징하게 되었다.


"약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이다!" 우리 사운드시스템에서 목소리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괴짜들은 이미 자기 세상을 만나 백화점과 슈퍼마켓 밖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근육질의 남자들이 윗옷을 벗은 채 헬스장에서 단련한 몸매를 과시했고, 긴 머리에 프랙탈 셔츠를 입은 히피요정들이 우리 뒤에서 빙글빙글 돌며 활보했다… 어떤 남자는 화학전 복장에 방독면을 쓰고 이리 저리 뛰어 다녔고, 또 어떤 사람은 속옷차림으로 길 한복판에 고꾸라져 자기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주의 환상을 응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당시 분위기에는 유토피아적인 수사법이 차고 넘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경계에 퍼져있던 MDMA의 양을 생각해볼 때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것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몇 달 전에 Love Parade를 창시한 영원한 몽상가였다. Dr Motte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Matthias Roeingh는 80년대 초에 펑크밴드에서 활동하다가 베를린 최초의 애시드 하우스 클럽들 중 몇을 운영하게 된 베를린 토박이 DJ였다.


Motte에게 있어 애시드 하우스는 80년대의 장벽도시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가는 탈출구였다. 몽상가들이 약간의 화학적 도움을 받아 현실과 퍼레이드카의 굴레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영역. 그는 이후에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과 같았어. 베를린에는 벽이 있었는데 거기에 갑자기 문이 생기더니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된 거야. 엄청났지. 그게 우리의 정신세계를 열어주었고, 우리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어."


Motte 자신은 1988년의 애시드 하우스 `Summer of Love` 중 떠났던 영국여행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향수에 젖은 눈빛을 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 친구들이 런던과 맨체스터, 셰필드의 언더그라운드 파티에 대해 말해줬어. 경찰이 와서 파티를 중지시키고 사운드시스템을 압수해가도 사람들은 거리에 커다란 휴대용 라디오를 갖다 놓고 춤을 추며 거리의 파티를 즐겼다고. 거리의 파티라니! 바로 꽂혔지. 여기서도 할 수 있을까? 즉흥적인 거리의 파티를? 어떻게?"





1989년 어느 늦은 밤, Motte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장난을 친다. 그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 뒤 10년을 정의하고, 심지어 베를린의 이미지를 통째로 바꿔버리는 것에 한 몫 하게 되는 장난을. Motte는 여전히 분리되어 있었던 베를린의 중심부에서 행복과 통합을 위한 시위를 열기로 결심했다.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고, 좋다고 믿었던 것을 위한 항의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바로 레이버들의 행진, 어두운 지하세계의 사람들을 밝은 세계로 이끌어내는 것, Love Parade였다…


제일 처음에 이벤트 슬로건으로 고른 것이 `Friede, Freude, Eierkuchen`였다. `평화, 기쁨, 팬케이크`라는, 아이러니하게 유머러스한 뜻의 독일어 표현이었다. Motte는 그런 슬로건에 대해 이 행사가 음악과 균등한 식량분배를 통한 평화와 세계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시위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행사가 정치적인 시위로 등록되도록 신청했는데, 이것은 치안유지비나 파티가 끝난 후 청소비용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행사를 허용했지만 당시 Motte의 협력자들 중에는 그게 베를린의 중심에서 합법적으로 레이브를 벌이기 위한 낯짝 두꺼운 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DJ Westbam은 이렇게 말했다. "농담한 거지. 근데 난 그게 되게 좋았어. 전형적인 베를린식 무정부주의가 담겨 있었거든."


1989년에 열린 제 1회 Love Parade에는 약 150명의 흥겨운 레이버들이 참가해 쿠담거리를 따라 걸었다. 스마일이 그려진 티셔츠와 반다나 차림, 80년대 평상복, 또는 포스트펑크 시대의 단색 차림을 한 사람들이 유행하는 애시드 하우스 스타일의 음악에 맞춰 팔을 흔들었다. Motte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비텐베르그플라츠에서 시작했어. 거기에 쬐깐한 밴 세 대에 스피커, 발전기를 두고 서 있었지. 아, 테이프 덱도! 테이프 덱을 썼다니까!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어. 영국날씨처럼 비가 오긴 하는데 좀 애매하게 오는 거 있지. 언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채 거기 그냥 서 있었어. 그런데 경찰이 오더니 묻는 거야. ‘지금 시작하실래요?’"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한지 Motte는 웃음을 터뜨렸다. 경찰관이 테크노 반란군들에게 난장판 폭동을 시작하겠냐고 묻는 상황이라니. "우리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거든! 이런 걸 해본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날 댄서들 중에는 이후 베를린 테크노씬으로 성장하게 되는 핵이 있었다. Motte가 말했다. "등줄기에 소름이 좍 돋더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에너지였어." Westbam은 그때부터 이미 이 행사가 뭔가 중대한 것이 되리라는 느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우리가 역사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몇 년 만에 사람들이 백만 명으로 늘어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 몇 달 뒤에 장벽이 무너질 것도 전혀 몰랐는걸!"


내가 1992년도 Love Parade에서 Tanith를 만났을 때도 그 열기는 여전했다. Tanith는 가능성의 문이 열린 것에 대해 잔뜩 낙관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클럽은 동서가 처음으로 모인 장소였고 사람들은 거기서 서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


초기 참가자들 다수가 여전히 이 사실에 동의한다. Love Parade 주최 멤버 Jürgen Laarmann는 몇 년이 지난 뒤, 통일된 베를린을 하나로 묶는데 테크노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댄스플로어 위에서, 스트로보스코프와 레이저 아래서, 비로소 진정한 재통합이 이뤄졌고, 사람들은 정말로 동등해졌어."












Love Parade는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고 1996년부터는 쿠담거리에서 장소를 옮겨야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시내 중심가에 다 들어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로 매년 도시의 소비자 공간을 탈환하는 하위문화적 과거에서 깔끔하게 결별하게 되었다. 새로운 장소인 Strasse des 17. Juni 역시 중대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Adolf Hitler가 나치 퍼레이드를 했던 바로 그 곳, 1953년 동독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폭동사태 후 개명된 바로 그 도로였던 것이다. 그랬던 곳이 이제는 엄청난 레이브 씬이 된 것이다. 새로운 통일독일을 위해 이보다 명백한 상징주의는 없었다. Westbam은 이렇게 말했다. "장벽이 무너진 뒤 종전상태의 독일의 재발명되는 것 같았어. 완전히 다른 그림이 그려졌지. "


숫자 면에서 볼 때 퍼레이드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절정에 치달아 구 장벽의 그늘에서 뿌리를 내린 하위문화와 동떨어진 포퓰리즘적 대규모 데이글로 레이브 축제가 되었다. 심지어 Love Parade의 어마어마한 상업화를 반대하며 Fuck Parade라는 테크노 반대데모가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Love Parade는 많은 사람들에게 총체적인 변절이라는 비판을 들으며 한 피트니스 클럽 체인에게 팔려갔다. 2007년에는 베를린에서 루르지방(Ruhr Valley)으로 장소를 옮겼는데 거기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무자비한 비극을 겪고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2010년 7월 뒤스부르크에서 21명이 압사당한 것이다. Love Parade는 끝났지만 베를린은 Love Parade가 있었기에 쾌락주의자들의 동화나라이자 유럽의 창조도시 중 하나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특별한 역사적 순간을 살고 있는 젊은 모험가들의 높은 이상과 미친 꿈을 토대로 세워진 이 관점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Dr Motte가 몇 년 후 회상한 것과 같이,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가능해졌다. "그때는 모든 게 즉흥적이었어. 모든 게. 극도의 파라다이스였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었고, 아무도 신경을 안 썼어."




Matthew Collin의 신간 [Pop Grenade: From Public Enemy to Pussy Riot – Dispatches from Musical Frontlines]는 Zero Books를 통해 2015년 5월 9일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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