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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Cox : The Legend
살아있는 전설이 Space Ibiza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준비한다.
글: Thomas H Green 사진: Uli Weber | 2016-06-22

대영제국의 산업발달이 절정을 찍는 것부터 그로부터 한 세기 이후에 음침한 쇼핑센터가 들어서는 것까지, 런던 이스트엔드(East End)의 Tobacco Dock은 한 자리를 지키며 많은 것들을 목격해왔다. 하지만 대낮부터 10시간 동안 내내 똑 부러지는 파티별종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아치형 공터를 가득 메우는 SIDEXSIDE 데이레이브는 분명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다. 이따금씩 비가 내리며 통로 발코니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의 옷을 적신다. Car Park와 Little Gallery에 모인 관중은 각각 Seth Troxler vs Loco Dice와 Joris Voorn vs Kölsch의 셋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특히 Joris Voorn과 Kölsch는 연신 취향 좋은 레트로 애시드를 선보이며 한창 즐기는 중이다. 그러나 관중은 Great Gallery를 향해 이동하는 분위기다. 댄스뮤직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살아있는 전설 Carl Cox가 막 Nic Fancuilli와의 백투백을 마치고는 한 줄로 늘어선 Pionner CDJ를 사생결단으로 난타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가 민머리에서 땀방울을 튀기며 Nile Rodgers 콜라보 ‘Ooh Baby’의 David Tort 리믹스의 진동수를 천천히 짜내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절정의 순간에 드럼 레이어를 두텁게 깐다. 영국 전역을 비롯해 각지에서 모인 관중이 무아지경에 이르며 더욱 격렬하게 춤을 춘다.


Coxy는 근 30년을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켰다. 한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동료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춰도, 그만은 80년대의 발레아릭 비트부터 90년대의 하드코어 정글리즘, 그리고 마침내 2000년대의 테크노의 거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자유자재로 스타일을 바꾸며 쉼 없이 달려온 것이다. 그가 페이더를 가볍게 튕기고, 허리를 세우더니 트레이드마크인 함박웃음을 날리며 허공으로 손을 쭉쭉 뻗는다. 부족의 머신드럼 대전쟁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른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이 있다. Carl Cox가 Space의 위클리 레지던시만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비자에서 활동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Carl Cox가 영국을 영원히 떠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디제잉을 관둔다는 말도 들린다. 오늘 Tobacco Dock의 열광적인 공연이 정말 단계적 은퇴의 시작일까?


브라이턴(Brighton)의 해안지구에 있는 Grand Hotel에서 만난 Carl Cox는 긴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차를 홀짝이며 샌드위치를 조금씩 베어 물고 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회색 톤의 모자이크 셔츠 위에 비슷한 톤의 스타일리시한 디너 수트 재킷을 걸치고 있다. 표정과 갈색 눈빛은 쾌활하다가도 신중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 순간에 딱딱해져 버린다. 그가 브라이턴의 옛날을 회상하며 말한다.


“1985년에 이곳에 이사를 왔는데 그땐 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 작은 재즈 바들에 가서 플레이를 하곤 했어. 손님이 꽉 차야 페이를 받았지. 내가 발전기와 사운드시스템을 들여놓은 술집과 허름한 창고가 한두 군데가 아니야. 입장에 레드스트라이프 맥주 한 캔에 1파운드였어. 얼리아워부터 아침까지 그것만 줄기차게 들이부었지. Zap Club에서 플레이한 적이 있는데 새벽 3시에 마치고 자러 갔는데 4시에 친구 한 명이 와서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거야. "심심해. 니 사운드시스템 가지고 Black Rock 가서 놀자.” Cox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잇는다. “그러면 나는 잠깐은 좀 짜증을 냈지. 방금 깼으니까. 그러고는 ‘그래, 켜. 가자.’ 이러고 가서 해 뜰 때까지 플레이했어. 진짜 끝내줬지!”


즐거운 추억에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가 브라이턴 해안지구에서 프리파티를 즐긴 지 워낙 오래되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미친 듯한 희열을 주는 댄스뮤직의 힘을 믿는 신념은 사그라들지 않은 채 그대로다. 이 남자는 자그마치 애시드 하우스가 탄생하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 Danny Rampling의 획기적인 Shoom에서 오프닝을 플레이했던 사람인 것이다.


그는 M25 순환도로 레이브에서도 플레이했다. Fantazia, Dreamscape, Heaven의 Rage 등 시대를 정의하는 행사들에서 플레이했다. 1991년의 ‘I Want You (Forever)’부터 90년대 내내 히트곡을 줄줄이 제조해냈다. 1999년에 발표한 믹스 CD ‘F.A.C.T.’는 수십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그를 한 단계 높은 경지로 올려놓았다. 21세기에는 테크노 대가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그의 레이블 Intec도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2006년에 Intec Digital로 부활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Tomorrowland, Ultra, Electric Daisy Carnival 등 메이저 페스티벌의 무대와 세계 각지에 수천만 명의 청취자를 보유한 자신의 라디오 쇼를 직접 큐레이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다 물론 Space를 빼놓을 수 없다. Carl Cox는 15년간 이비자 시즌의 필수적인 인물로서 초창기부터 이비자 씬의 역사를 써온 것이다.





그가 말한다. “일요일마다 We Love… Space on the Terrace에서 플레이했어. 원래는 6시간부터 시작했는데 거기서 슬슬 Steve Lawler랑 Pete Tong을 부킹하기 시작하더라. 내 시간을 줄이는 거야. 세 시간, 두 시간, 결국에는 한 시간 반으로. Space 사장 Pepe [Roselló]가 나한테 목요일로 요일을 바꿔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 나는 그 안이 늘 재미있긴 했는데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곳이었어. Terrace에 사람들이 너무 몰렸고, 한치 앞이 안 보이게 캄캄했고, 에어컨이 조절이 안 돼서 냉동인간이 될 판이었지.”


그래서 Cox는 잽싸게 그 기회를 잡았을까?


“아니.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조건을 세 개 달았지. 첫째, DJ 부스 위치 바꿀 것. 부스가 엉뚱한 데에 있었거든. 둘째, 화장실 악취 해결할 것. 셋째, 사운드시스템 엉망이니까 교체할 것. 그러고선 다음 시즌에 가봤는데 짠! 다 해결된 거야. 그래서 ‘오, 그러면 이거 해야겠네!’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는 일을 맡았고, Cream과 직접 맞붙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목요일에서 화요일로 옮겼다. 그는 15년 동안 자신의 Music Is Revolution 세션을 이비자의 전통으로 구축해나갔다. 하지만 올 여름, Music Is Revolution은 9월 20일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문을 열지 않는다.


Cox가 설명한다. “Pepe는 Space를 만들고 키워낸 사람이야. 27년 전에 [이비자의 부동산 거물인] Abel Matutes가 Pepe에게 어떤 주차장의 조그만 공간을 빌려줬지. Pepe가 80살이 되면 그 땅을 돌려주는 게 계약조건이었는데 그게 올해거든. Pepe 없는 Space는 상상할 수가 없어. 그게 잘 돌아갈 리가 없다고. Space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Ushuaïa도 Matutes 패밀리가 운영하는 곳인데 거기 관리자도 일을 진짜 잘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 ‘Space의 비결이 뭐냐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라고. 15년 동안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근사한 나날을 보냈고, 내가 원하는 DJ들을 부킹했고, 내가 원하는 대로 클럽을 일궈나갔어. 그 클럽에서 내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준 사람이 Pepe야. 그런 그가 은퇴하기로 했다면 나도 같이 떠날 거야.”


듣고 보니 Cox 디제이 은퇴설이 왜 나왔는지 알겠다. 그 말에 그가 짜증이 약간 섞인 말투로 대답한다. “아니, 다들 왜 Space를 그만하는 걸 가지고 내가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침착해! 숨 쉬어, 숨! 속도를 늦춘다는 건 맞아. 그건 확실해. 이제는 장거리이동을 하면 몸이 힘들단 말이지. 골치도 아프고. 상쾌하게 아침을 맞는 것 좀 해보고 싶어. 온갖 타임존을 들쑥날쑥 돌아다니는데 잠을 잘 수가 있나. 수면제를 먹고 싶지는 않은데 정상적으로 8시간을 자본 적이 언젠지 기억도 안 나. 이제는 낮보다 밤에 활동하는 게 익숙해. 낮에 일하고 밤에 자는 생활리듬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간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되어버릴 걸. 하지만 나 아직 안 끝났어. 택도 없지. 약간 좀 헐렁하게 가겠다는 거야.”


Cox는 음악 말고도 하는 일이 많다. 지난 11년간 10월부터 3월까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에 정착해서 살아왔다. 약 5만평의 땅에 (경주마들이 먹는) 알팔파도 키우고, 해안가에 집도 몇 채 가지고 있다. 수집하고 있는 모터사이클도 70대가 넘는다. 평소에 가장 애용하는 기종은 Ducati Diavel. “아주 악마같이 달리는 녀석이지. 외관도 잘빠졌고, 타고 있으면 락스타가 된 기분이라니까.” 그는 아메리칸 머슬카도 수집하고, 헤미엔진을 장착한 Plymouth Roadrunner 572 등 클래식카도 가지고 있다. 1968년형 컨버터블 428 Cobra Jet 등 머스탱만 해도 세 대가 있다. 심지어 그가 처음으로 성공을 거뒀을 때는 영국에서 산 1989년형 Mercedes 560 SEC을 배편으로 실어서 가지고 갈 정도였다.


단순히 수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Cox는 사이드카 레이싱팀인 Carl Cox Motorsport까지 결성했다. 그의 팀은 뉴질랜드 선수권대회 우승팀이며, 매년 열리는 맨섬 TT레이스에서 눈에 띄는 진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TT 레이스는 Cox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 중 하나다. 몇 년 전부터는 레이스 애프터파티의 디제잉도 맡았다. 자동차마니아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The Prodigy의 Keith Flint가 그의 파티친구다. Cox가 말한다. “팀이 경주하는데도 디제잉하느라 가볼 수가 없어. 내가 거기 있어야 한단 말이야. 언젠가 디제잉을 그만두게 되면 곧장 그리 가야지.”


호주는 그의 자동차 활동무대일 뿐만 아니라 레코딩 스튜디오의 작전기지이기도 하다. Cox는 호주 작업실에서 정기적으로 프로듀서 Josh Abrahams와 David Carbone과 함께 작업한다. 2011년에 낸 4집 앨범 ‘All Roads Lead to the Dancefloor’는 다양한 호주 게스트 아티스트들이 대거 피처링했다. 앨범을 오스트레일리아의 페스티벌 Stereosonic의 라이브공연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는데, 그는 그 앨범이 자랑스러웠지만 사람들의 이해를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더 이상 밀고 나갈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Cox는 그 앨범이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기색이다. “내 음악은 다른 누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심사숙고를 거쳐서 제대로 제작된 음악이야. 그런데 거기다 Carl Cox 딱지만 붙이면 사람들은 ‘에이, DJ랑 프로듀서를 동시에 어떻게 한다고’ 이러는 거야”





그가 프로듀싱의 추억에 잠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UK TOP 40 히트를 5번 달성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DJ들이 따라갈 수 없는 기록이다. 태국의 한 호텔방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랩탑의 무료 소프트웨어로 만든 2002년도 ‘Club Traxx’ EP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그가 Hannah Robinson이 피처링한 2011년작 ‘Give Me Your Love’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


“내가 지금까지 만든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중 하나야. 완성하고선 진짜 눈물 날 뻔했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안 쓰고 순수하게 열정만 가지고 만든 곡이거든.”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른 일화를 끄집어낸다. “[1995년에] The Stone Roses가 ‘Begging You’ 리믹스를 해달라고 요청했었어. 기타랑 보컬을 살리면서 브레이크비트로 작업을 하고선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최근에 유튜브에서 그걸 발견한 거야.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들어보니까 개척정신도 있고 꽤 괜찮더라고. 최고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런 근사한 트랙들로 구성된 디스코그래피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프로듀서로서는 DJ로 인정받는 것만큼의 수준에 이르진 못했지만, 뭐, 그럴 운명이 아닌가 보지. 난 괜찮아.”


정반대로, 그의 프로덕션은 여전히 수요가 많다. 여러 장의 음반이 출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D-Shake의 Dutch 1990 프로토트랜스 클래식 ‘Yaaah!’, Pan-Pot의 ‘Riot’의 리믹스, Nile Rodgers와 함께 레코딩한 신작, 그리고 올해 초 타계한 모친에게 헌정하는 ‘Your Light Shines On’ 등이다.


Cox의 어머니는 Carshalton에 살던 시절 십대였던 Cox에게 첫 덱과 Garrard 벨트드라이브 턴테이블 한 짝을 사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Garrard 턴테이블은 다루기가 쉽지 않았지만 Cox는 덕분에 그 어떤 싱크버튼보다 유용한 미친 듯한 덱 스킬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사우스런던 소울보이 마피아 주변에 있으면서 Paul Oakenfold의 오랜 동료가 되었다. 두 사람 다 명성을 얻기 전이던 시절에는 Paul의 Mini Clubman의 정비를 주기적으로 봐주기도 했다. 레이브가 꽃피면서 그의 기술적인 사운드시스템 스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다가 90년대에 폭발했을 때 그는 플라이어에 자신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가게 했다. 그가 5월 12일 Fabric에서 Mixmag을 위해 레어한 클래식 셋을 플레이했던 것도 이때로 회귀한 것이었다.





Cox가 말한다. “평소에 그런 셋을 잘 안 하는 데다가 그 기록적인 음반들을 그 스토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50대라고 다 근사한 시절을 기억한다고 할 수 없어. 그 사람들은 대부분 침대 속에 파묻혀있고.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지.”


물론 90년대는 극단적인 시절이기도 했다. Cox는 Cream에서 공연을 마치고 현재는 철거된 리버풀의 Moat House Hotel 방에 25명을 불러들여 애프터파티의 끝을 보곤 했음을 추억했다. “한동안 로큰롤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그는 14년 전에 결국 췌장염과 궤양, 부정맥으로 병원신세를 지고 만 것이다.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2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은 Cox는 담배와 술, 붉은 고기를 끊고 애프터파티까지 멀리했다. 결국 남은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음악이었다.


Cox가 말한다. “그야말로 환상적이지. 어떤 인물이 되어야겠다고 작정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냥 음악이 사람들을 웃음 짓게 만든다는 사실이 너무 좋을 뿐이야. 30년이 지나고도 이 짓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너무 좋고. 활동량이야 좀 줄일 거긴 하지만 계속해서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거야. 예를 들어 3년 만에 처음으로 Glastonbury에서 공연할 거고. 아무튼 내가 클럽에서 공연하든, 페스티벌에서 하든, 누구라도 놓치기 싫어할, 그만큼 더 특별한 수준에 이르게 만들 거야.”


그가 지난 세월 동안 바꿔온 것은 댄스플로어만이 아니다. Nicole Moudaber (“날 발견한 사람이 바로 Carl이야. 내 음악을 라디오쇼에서 플레이했거든. 나를 Space로 가장 먼저 초대해준 사람들 중에 Carl이 있었는데, 덕분에 아직까지 거기서 플레이하고 있는 중이지”) 같은 언더그라운드의 히어로들부터 Hardwell (“Carl이 Space를 떠난다는 것은 이비자뿐만이 아니라 클러빙 전체의 손실이야. Carl은 무엇을 대하든 대담하고 창의적이고,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의 씬에서 진정한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야. 그가 덱에서 내뿜는 에너지는 늘 내가 영감을 주었어. 디제잉의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에 견줄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같은 EDM 슈퍼스타까지 수 세대에 걸친 DJ들이 ‘빅맨’ Carl Cox를 통해 영감을 얻거나, 심지어 육성되었다. 그의 지속력을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Carl Cox는 레이브 시대의 종말을 비롯해 슈퍼클럽과 빅비트,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밀레니엄의 슈퍼스타 DJ에 대한 대중의 반발, 미니멀의 물결, EDM 폭발의 현장을 고스란히 함께 했다. 그것도 DJ계의 창공에서 아마도 가장 커다란 별이라는 입지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열정과 겸손함이다. 자기 방에서 프로듀싱을 하다가 한 순간에 헤드라이너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Carl이 매년 만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음악을 향한 틀림없는 본능도 한몫 했다. 그의 ‘귀’는 돌연 유행을 초월하면서도 완벽하게 동시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Carl Cox의 파워가 발현되는 시간은 그가 디제잉을 할 때다. 그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음악에 대한 자기 안의 즐거움과 열정을 수많은 사람에게 단번에 옮겨버리는 탁월한 재능을 잃지 않고 있다. 그가 오후 10시 20분에 플레이한 Tobacco Dock 현장은 마치 새벽 4시의 창고레이브 같았다. 그의 셋이 절정에 이르면 그곳이 어디든 테크노 폭풍이 몰아치는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그가 활동량을 줄이겠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에 맞게 그를 귀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Carl Cox: Music is Revolution, The Final Chapter는 6월 14일부터 9월 20일까지 매주 화요일마다 Space Ibiza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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